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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선생전집(河西先生全集)

자료명 하서선생전집(河西先生全集) 저자 金麟厚(朝鮮) 撰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김린후(조선)찬(金麟厚(朝鮮)撰)
청구기호 K4-6629 MF번호 MF35-1574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別集類/詩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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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114399
서명河西先生全集
저자金麟厚(朝鮮) 撰
판사항木版
간사사항純祖 2(1802)
청구번호K4-6629
MF번호MF35-1574
형태사항線裝 本集 12卷, 附錄 4卷, 合 8冊:四周單邊, 半郭 23.6 × 15.8 cm, 有界, 半葉 10行 20字, 註雙行;33.7 × 21.8 cm
인기印 : 藏書閣圖書印
안내정보
해제「河 西 先 生 全 集」해 제 金智勇 -차례- 1. 머리말(河西集 개요) 2. 河西先生 약전(略傳) 3. 「河西先生全集」 편찬과 간행의 경위 4. 「河西先生全集」의 내용 5. 붙임(百聯抄解 빛 別去俸과 遺墨) 1. 머리말(河西集 개요) 이조 전기에 있어서 훈민정음 보급과 국어발전에 기여한 업적은 諺解사업이었고 그 중에서도 문학발전에 크게 이바지 한 공로는 杜詩諺解와 百聯詩抄解였다. 百聯詩를 언해한 河西 金麟厚의 文集이 「河西先生棒」이요 지금 藏書閣이는 그 再重刊本인 16권 8책이 소장되고 있다. 최근 河西先生記念事業會에서도 「河西全集」을 景印하여 출간 한 바 있는데 이중에는 본집 12권, 부록 4속편과 속편부록 그리고 百聯抄解 遺墨등 합쳐서 4×6배판 570여 면의 방대한 문집을 펴 낸 바 있다. 창경원 장서각에 수장된 이 「河西先生全集」은 본집12권, 부록 4권으로 모두 8책으로 1802년(純祖 2년 壬戌메)에 重刊한 木板本으로 책 모양은 四周單邊에 半郭이 23.6×15.8㎝이요. 界線이 있되 한 면 10行, 한 줄에 20字씩 써서 새기고,註는 두 줄로 넣었고, 책 전체의 크기는 가로·세로가 21.8×33.7㎝이다. 板心에는 四葉 花紋이 陰刻 陽印되어있으며 그 위쪽에 河西先生全集을 아래 쪽이 卷차례, 目錄이름, 葉數등을 刻印하였다. 종이는 楮紙오· 제본은 袋綴, 線裝으로 비교적 더러움을 타지 않은 선명한 한서이며 표제는 「河西集」이라 墨書했고 책 初葉에 「藏書閣圖書印」이 찍혀있다. 이 문집은 河西先生의 詩文集이지만 한시가 위구요 문장은 雜著라하여 극히 적은 양이고 그의 名論인 「西銘事天圖」와 「周易觀象篇」 그리고 그의 名篇인 「百聯詩懈」는 각각 따로 전한다. 그러고 續編도 각각 散在하던 것을 모아 「河西全集」이 合本하되 주로 선생의 行狀 과 年譜와 祭文, 祝文, 散見되는 선생 遺作들이었다. 2. 河西 金麟厚先生의 略傳 金麟厚선생은 1510년(中宗 5년)부터 1560년(明宗 15년)까지 사신, 이조의 문신이요 유학자이다. 字는 厚之요 號가 河西 또는 澹齋이며, 석학 金安國의 門下로 成均館에서 李滉등과 同學했다. 이제 선생의 文集中 年譜1)를 통하여 生涯와 學德을 略記하여 보면, 선생은 中宗 5년(l510) 7월 19일 長城縣大麥洞里 本第에서 參奉 蔚山金氏 齡의 아들로 태어나 5세에 修學을 시작하고,8세에 시를 짓되, 당시 관1) 註先生의 年譜는 全集中 附錄 卷三에 收錄되었고 또 績 傳 集年譜上下에도 詳述되어있다. 찰사 趙元紀와 聯句2)를 하였다 하니 神童이었던 모양이다. 10세에 慕齋金安國先生에게서 小學을 배우고 13세에 詩徑 등 四書五經에 沈濬玧讀하고,14세에 縣監 尹任衡의 따님과 결혼하고 15세에 아들 金從龍을 낳았다 이를 보면 선생은 아마 조숙하였던 모양이다. 18세 때 新齋崔山斗외 四書五經을 論學하였고,19세에 上京하여 容齋 李荇이 七夕試文衡이었을 때 장원하였고, 22세에는 成均司試에 급제하였으며,24세에 泮宮(成均館)에 들어 李退溪와 同學하였고,31세에 別試文科의 丙料에 들어 承文院副正字에 오르고, 32세에 弘文館正字에 오르고,33세에 弘文館 著作이되고,34세에 弘文館 博士兼世子侍講院說書에 이르고, 이어 弘文館 副修撰으로 승진하였다가 己卯士禍의 事因을 極論하다가 歸鄕하고 말았다. 그해 玉果縣監을 제수 받았으나 나가지 않았고,35세에는 製述官으로 赴任하고 있다가 仁祖가 昇遐하시자 謝病歸家하였다. 이후 成均館 曲籍, 工曹正郞 등 벼슬을 여려 차례 제수했으나 선생은 일체 나아가지 않고 오로지 著述과 後進에게 講學하는 일에만 전심하였다. 선생이 지내온 직분이 모두 泮宮(大學)에서 講學과 著述의 일이었고 귀향 이후 孝經刊誤跋을 撰述한 것을 비롯하여 많은 著作과 詩作으로 일관하여, 후배 교도에 沒身하였다.3) 39세 때 鮎岩村에 寓居하면서 諸生을 講學아는 한편 詩作과 著述에 寧日이 없었고,40세 때 大學講義跋을 著述하고,44세 때는 弘文館 校理튿 제수 받았다가 바로 稱病歸鄕하였다 45세 때 임금으로부터 給食을 下賜받았으나 箋을 올리고 굳이 사양하였으며, 48세에 周易觀象篇과 西銘事天圖를 著述하고,49세에는 高峰奇大升과 더불어 大極圖說을 講論하였고4),50세 때는 一齋 李恒5)과 太極陰陽論6)을 整庵 羅欽順과는 人心道心說7)을 說論하였는데, 신생의 주장은 李恒의 理氣一物이라는 說과 奇大升의 理氣非一이라는 견해에 대하여,理氣混合이라 했고, 羅鉉대頂의 道心性也 人心情也至精之體 不可見故 曰微至變之用 不可測이라는 說과 齋 盧守愼의 “道心寂然不動 人心感而遂通이라는 주장이 대하여 聖人이 말하는 人心直心盖皆指動處”라는 이론을 찬동하였다 선생의 年譜에서는 李退溪나 奇高峰도 선생의 이런 견해를 좇았다고 했다8) 2) 先生入歲 與趙觀察元氷紀跡句에 時趙公觀察湖南 見先生而異之 因與占聯 趙公呼句曰 信宿完山飽梨園之風景 先生應聲曰 滯留豊騶沛梅亭之月光…(附錄 卷三 年譜) 3)先生自歸家以後專心講學學徒聞風而至者諄諄施敎 必使先讀小學次讀大學…(年譜) 5)一齋 李恒은 선생 맏아들 從龍의 丈人이니 사돈간이다. 선생은 51세(1560.1.3)에 長城 本第에서 작고하시고 大麥洞 願堂山 기슭이 묻혀있다. 1669(顯宗 10년)에 諡號를 내려 文靖公이라하고, 1796년(正祖 20년)에는 다시 文正公이라 賜諡하고 文廟와 長城의 筆岩書院등에 제사지냈다. 선생은 문신이요. 학자로서 특히 漢詩에 뛰어났고, 儒學經典을 穿鑿, 窮究한 문인이면서 또한 節義의 極本이면서 天文, 地理, 醫藥, 山水, 律曆에도 능통했다고 전한다. 遺著로는 「河西先生全集」외에 「周易觀象篇」과 「西銘事天圖」와 「百聯詩抄解」가 전하는데 「百聯詩抄解」는「杜詩諺解」에 버금가는 문학적 어학적 귀중한 자료가 되며, 특히 국문학사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1672(顯宗13년)에 神道碑를 세우되 碑銘은 宋尤庵이 撰했다. 3. 文集 編纂과 刊行의 經瑋 藏書閣所藏「河西先生全集」은 1802년(純祖2년)에 再重刊한 大板本이나 그 이전이 初刊 重刊 두 번이나 간행한 기록이 있다. 극 선생 沒後 8년 만인 1568년(宣祖1년 戊辰)에 처음 編箋 浸刊하였고, 그 뒤 다시 1686년(肅宗 12년 丙寅)에 重刊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한 상세한 경위와 편찬상황을 門人 趙希文의 奮序와 後學 宋尤庵의 序文, 後學 李直輔의 重刊跋, 朴世采의 舊跋, 後學 金日柱의 跋文, 그리고 年譜(附錄卷四)의 重刊言러둔을 검토하면서 살펴보기로 한다. 初刊 : 隆慶戊辰(1568) 春二月旣望에 門人 巴山 趙希文이 謹序한 내용 중에는 “애석하게도 선생의 全集이 화재의 액운을 만나 타 없어지니 “西銘事天圖” “周易觀象篇”과 같은 諸書는 볼 수 없다. 내(趙希文)가 遺稿를 찾아 모아 8년간에 若干卷의 원고를 얻어, 白光勳이 抄書하고, 監司宋相公과 都事閔升先生이 鳩材聚工하여 판을 새겨 책을 만드는데 板刻의 어려움과 校正의 정밀함이 여간일이 아니라서 門人 梁子徵과 申覺을 맞아 主役을 맡게 하고, 선생의 아들(次男) 從虎는 詩를모아 口誦하기를 數百全首에 이르렀고, 門人 盧適과 奇孝諫,·卞成溫등도 또한 각기 원고를 모아다가 손수 쓰고 판을 새겨 그 정성을 다하였으며, 그밖에 흩어진 門人들의 원고는 미처 수집 못한 것은 후일에 다시 別集으로 엮어 내기로 하고 役事를 마치되 서로 더불어 그 詩文을 외우고, 그 뜻과 아름다움을 찾으니 마치 옛적 선생님을 직접 대한 듯하고, 또한 사람으로 하여금 존경하고 사모하는 마음을 스스로 일으키지 않을 수 없게 하니, 뒷날 이 문집을 읽는 자도 또한 반드시 같은 감격으로 늘 스승을 직접 모시고 가르침을 받음과 같이 선생님을 사모할 것이니, 그 학문과 업적이 어찌 얕다고 할 것인가” 라고 하여 초간 때의 편찬 간행사정을 소상히 전하고 있다. 重刊 崇禎柔兆(丙) 攝提格(寅)9)孟夏日 즉 1686년(丙寅) 4월일에 恩津 宋時烈이 謹序한 내용 중에는 “선생이 돌아가신 뒤 여러 門人이 평소선생의 저술들을 모아 全集을 이루었으나 불행히도 화재로 없어졌는데 「西銘事天圖」 「周易觀象篇]같은 것은 볼 수 없으니 아까운 일이다…오오! 선생은 과연 호걸의 재사요, 도를 분명하게 밝힌 어른이다.…지금 선생의 외증손 李寀之가 와서 遺集의 序文을 내게 청함으로 평소 선생이 대한 소강을 여기에 쓰노라… 고 하였으므로 그 重刊의 취지와 움직임 등을 대략 알 수 있겠다. 또한 金日柱의 跋文중에도 “先是隆慶戊辰(1568)鏡刊文集, 肅宗丙寅(1686)重刊…이라 하였고, 특히 歲聃蒙(乙) 赤奮若(丑)10) 十一月 丙寅 潘南 朴世采謹識의 跋文 즉 1686년(纂宗 12년 丙寅)이 重刊할때의 상황을 보면: “선생 沒後에 遺集을 간행하여 세상이 전하더니 누차의 난리를 겪으면서 태반이 없어져서 장차 전할 것이 없을 것이므로 지금 相國인 文谷 金壽恒이 개연히 뜻한 바 있어, 다시 板刻할 것을 선생 玄孫인 金時瑞에게 간곡히 명하여 드디어 내게 와서 부탁함으로, 그 편찬의 役事를 사양못하고, 삼가 詩賦의 그精要한 것을 취하고, 雜女이 있어서는 빠진 것을 끼워서, 附錄까지 합쳐서 14권을 이루고 다시 남은 것을 거두어 엮어서 別集을 만들어 印刊을 마치고 跋文은 내가 쓰되… 라고 하여 重刊의 사정을 전하고 있다. 再重刊 : 장서각본인 재중간한 「河西先生全集」에 대한 重刊記는 1802년(純祖 2년 壬戊)의 後學 月城 金日柱의 跋文과 年譜중의 重刊記에 명시되어 있다. “…肅宗丙寅重刊及正宗丙辰(l796) 陞配文廟後上於筵中有重刊遺集之敎 至是役成… 壬戌(1802)月 日”이라 한 것은 金日柱의 跋文이고 “一百五十九年 今上 二年 壬戍(1802) 夏五月 重刊文集成”이라 한 것은 年譜의 기록이다. 이상에서 보면, 처음 문하생들이 선생의 문집을 선 9) 柔兆란 十干의 “丙·의 별칭이고 攝提格이란 十二支의“寅”의 별칭 10) 聃蒙은 十干의 “乙”의 별칭이고, 赤奮若은十二支의 “丑”의 별칭 생 작고 후 8년 즉 1568년에 간행하였으나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으로 불타 없어졌고, 다시 1686년에 중간하였으나 120년을 지나는 사이 또 산일되어 없어졌던 모양이다. 그래서 l802년에 다시 간행한 것이다. 4. 「珂西先生全集」의 內容 이 문집의 本集12권, 附錄4권의 내용은 : 총목록과 各卷 목록이 이어 卷首이다 御製賜祭文 2편, 文廟從祀敎書, 文廟從祀頒敎文, 文廟從祀祝文 각 1편을 싣고,序文으로 宋時烈謹序와 趙希文舊序, 그리고 跋文으로 李直輔의 重刊跋, 朴世采의 舊跋을 실었다. 卷一에는 賦 13편, 辭 5편을 수록하였는데 그의 七夕賦나 鹽賦는 初試때 뽐내던 문장들이요 吊比干辭나 別李上舍辭등은 哀切한 글이다. 卷二, 三에는 五言古詩 l52수가 수록되었고, 卷四에는 七言古詩 62수, 卷五에는 五言絶句 168수, 卷六,七에는 七言絶句가 321수 卷八이는 五言律이 113편 卷九에도 五言律이 104편, 卷十에는 七言律 177, 五言排律 21, 七言排律 6편 등이 수록되고있으니 詩賦만도 무려 1,142편이나 된다. 絶句 몇 수를 들어 보이면 倪仰亭三十詠(亭在潭陽府南十里 亭主 宋新平 退老棲息于此) 추월이라 산 이름도 좋을시고 푸른 벼랑은 사면이 둘러있고 골짜기 솟는 구를 어김없이 이는구나 밤마다 돌아가며 맑게도 비추누나 (秋月山名好 蒼蒼削四圍 溪雲莫곶起 夜夜輾淸輝…〈秋月 翠壁〉) 야윈 등잔불 나그네 집에 받은 외롭고 돌아 갈 손은 아직 가지 못하는데 두견새는 그 어느 곳에서 우느뇨 달 비춘 가지 끝에 산꽃은 만발했네 (殘燈孤館夜 歸客未歸時 杜宇啼何處 山花月漸枝〈旅夜〉) 저녁으스름 여울가를 거닐으면 소나무 바람 소리는 여울물 소리에 장단맞추네 흰 달빛은 다시 흰 물결을 돋우어주고 유유한 마음은 시원케 맑아라 (黃昏緩步行 松韻和灘聲 素月更流彩 悠然心境淸 〈松灘翫月 〉) 대숲은 안개를 띠고 가을 바람에 쓸쓸한데 어느 날에 구름을 뚫고 푸른 하늘을 쓸러나 짧은 잎은 봄을 머금고 섬돌 위에 비추고 한들가지는 비를 희롱하며 흙담장가에 나부낀다. (蕭蕭苦竹帶風烟 何日穿雲掃碧天 短葉藏春沙<체0x75B2>上 輕枝弄雨土墻邊 〈古竹〉) 卷十一은 剖 1편, 書 6편, 序 2편記 1편, 跋 2편이 수록되고, 卷十二에는 贅, 贊 銘, 頌, 啓, 上樑文이 각1편,箋이 3편 祭文 4편, 墓誌銘 5편, 雜著(論, 說, 刊誤등) 5편이 수록되고, 附錄에는 家狀, 行狀, 神道碑銘. 墓表, 墓誌銘 跋 그리고 世系와 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5. 불임(「百聯抄解」 및 別集과 遺墨) 河西 金麟厚는 儒學의 大學이요, 節義의 模範이며, 文章의 大家로 당시에 소문 났고, 후세에 귀감이 되어왔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 더욱 유명해진 것은 그의 「百聯抄解」때문이요, 이는 과연 국문학사상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百聯抄解」는 7언 고시 중에서 聯句 99句(對句)를 골라 뽑아서 한 對句씩 諺解하되 漢字마다 그 音을 적고 귀마다 해석한 것인데 100聯詩 초해라 했지만 정확히는 99聯詩이다 첫머리에 “百백聯련抄초解해”라하고 풀이하되 “온갖 글귀 빠(빻아) 사긴(색인)것이라"하였다. 이 마디까지 넣으면 100마디가 되기는 하지만 시귀는 99이다. 시는 7언고시 중에서도 춘하추동의 花朝月夕을 읊되 꽂, 새, 바람, 물, 산, 수목 등을 소재로 한 시들을 추려서 번역했다. 그 한 두 예를 들면, “春춘,鳥됴弄롱春츈春츈不불恕노 曉효鷄계 唱챵曉효曉효無무言언 봄새 봄을 회롱하되 보미노티아니하고 새벳 달기 새베를 블로되 새비기 마리업도다” “花학笑쇼檻함前젼擊셩未미 聽텅 島됴啼데 林임下하渡누難란看관 고지 난간 알패셔 우으되 소리를듣디 하고 새숨풀 아래셔우로되 눈므를봄이 어렵도다 (“·”는 모두 “”나 “_”로 고쳤음) 선생의 別集은 續集이라하여 주로 선생에 대한 實錄의 抄와 傳敎, 祭文 墓表 諸家의 선생에 대한 추모시 등과 그리고 선생 遺作으로 본집에 마진 것을 모았는데 그 중에서 주목 할 것은 「悼林士遂(亨秀<호0x7B43>錦湖)寃死作短歌」와 「自然歌」와 「白鷗歌」등 短歌가 古今歌曲과 海東歌謠와 大東風雅이 鄭松江 宋尤庵 鄭松江의 時調로 각각 전하는데 續集이는 河西의 作品으로 短歌 漢詩와 해석으로 국문시조가 함께 실려있다. 〈엇그제 버힌 남기…〉의 시조 原文은 “昨日伐了木 百尺長松非也歟 若使少焉枉 可作棟樑材此後明堂傾矣 于何以支之” 〈청산도 졀로 졀로…〉의 시조 原文은 “靑山自然自然 綠水自然自然 山自然水自然 山水間我亦自然 已矣裁自然生 來人生將自然自然老” 〈노화 픤온곳에 낙하를 빗겨띄고·‥〉의 시조原文은 “蘆花發處 落霞橫帶 三三五五雜遊之彼白鷗 我輩江織舊盟將尋” 이와 같이 쓰고 그 구절 마다에 각각 국문으로 번역을 붙였고 註에 각 時調集에 誤傳퇸 연유를 설명하여 河西선생의 작품임을 밝혔다. 끝으로 선생의 遺墨은 「千字文」草書와 武夷九曲(朱喜作)을 措書한 글씨가 「河西全集」(河西先生記念事業會刊, 주간 邊時淵 1980년 6월 20일 全南 長城 발행 )에 수록되어 있다. 〈養明高等學校 校長〉 〈p. 32에서 계속〉 製作番號 圖書番號 編著者 書名 刊種, 刊年 冊數 Roll數 Frame數 74,1274 2-176 閔致* 燭錄 高宗未 1888 7 1 616 74,1247 2-153 宋寅明 勘亂錄 英祖 5(1729) 4冊中 1冊 1 53 74,1275 2-153 宋寅明 勘亂錄 英祖 5(1729) 4冊中 3冊 1 224 74, 1275 1-47 洪直弼 梅山先生禮說 高宗30(1893) 4 1 419 74, 1276 2-221 古典刊行會 三國遺事 寫本 1932 2 1 220 74, 1276 1-48 尹* 明齊先生疑禮問答 英祖20(1744) 4 1 317 74, 1276 2-40 崔景煥 大東歷史 光武 9(1905) 2 1 135 74, 1277 2-182 宮內府 南巡幸時日記 隆熙 3(1903) 3 1 323 74, 1277 1-54 李爀撰 四禮纂說 高宗 4(1867) 4 1 335 74, 1278 2-97 未詳 됴야희통 寫年未詳 54冊中 14冊 1 660 74, 1279 2-97 未詳 됴야희통 寫年未詳 54冊中15冊 1 660 74, 1280 2-97 未詳 됴야희통 寫年未詳 54冊中18冊 1 660 74, 1281 2-97 未詳 됴야희통 寫年未詳 54冊中7冊 1 220 74, 1281 2-54 李王職 秘書監日記 寫年未詳 21冊中 8冊 1 441 74, 1282 2-54 李王職 秘書監日記 寫年未詳 21冊中 7冊 1 660 74, 1283 2-54 李王職 秘書監日記 寫年未詳 21冊中 5冊 1 669 74, 1284 2-54 李王職 秘書監日記 寫年未詳 21冊中 1冊 1 58 74, 1284 2-78 兪棨撰 麗史提綱 顯宗 8(1667) 23冊中 13冊 1 603 74, 1285 2-78 兪棨撰 麗史提綱 顯宗 8(1667) 23冊中 10冊 1 465 74, 1285 1-142 張謙宜 四書廣註 刊年未詳 18冊中 1冊 1 200 74, 1286 1-142 張謙宜 四書廣註 刊年未詳 18冊中 10冊 1 649 74, 1287 1-142 張謙宜 四書廣註 刊年未詳 18冊中 7冊 1 565 74, 1287 1-62 柳長源撰 常變通考 純祖30(1830) 12冊中 2冊 1 100 74, 1288 1-62 柳長源撰 常變通考 純祖30(1830) 12冊中 7冊 1 660 74, 1289 1-62 柳長源撰 常變通考 純祖30(1830) 12冊中 3冊 1 349 74, 1289 1-30 胡廣 書傳大全 正祖年間(1777-1800) 10冊中 4冊 1 310 74, 1290 1-30 胡廣 書傳大全 正祖年間(1777-1800) 10冊中 6冊 1 506 74, 1290 2-51 林象德 東史會綱 純祖(1816-1834) 10冊中 2冊 1 202 74, 1291 2-51 林象德 東史會綱 純祖(1816-1834) 10冊中 7冊 1 660 74, 1292 2-51 林象德 東史會綱 純祖(1816-1834) 10冊中 1冊 1 41 74, 1292 2-58 肅宗命撰 宣廟寶鑑 英祖 6(1730) 5 1 329 74, 1292 1-199 樂韶鳳撰 洪武正韻 英祖46(1770) 5冊중 4冊 1 2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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