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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암집(圃巖集)

자료명 포암집(圃巖集) 저자 尹鳳朝(朝鮮) 撰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윤봉조(조선)찬(尹鳳朝(朝鮮)撰)
청구기호 K4-6614 MF번호 MF35-1453~5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別集類/詩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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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호114383
서명圃 巖 集
저자尹鳳朝(朝鮮) 撰
판사항木版
간사사항正祖年間(1777 - 1800)
청구번호K4-6614
MF번호MF35-1453~5
형태사항線裝 22卷 11冊:四周雙邊, 半郭31.1 × 16.8 cm, 有界, 半葉10行20字, 註雙行, 上三葉花紋魚尾;32.4 × 22.0 cm
인기印 : 李王家圖書之章
안내정보
해제~ 23-1057 포암집 (圃巖集) 조선 후기의 문신·학자 윤봉조(尹鳳朝)의 시문집. 22권 11책. 목판본. 서·발문 등이 없어 편집·간행경위가 자세하지 않다. 권1∼6은 시 690편 1, 080여수, 권7·8은 소(疏) 25편, 권9는 소(疏) 17편, 차(箚)·계(啓)·의(議) 각 1편, 권10·11은 서(書) 68편, 권12는 서(序) 23편, 권13은 기(記) 20편, 제발(題跋) 20편, 권14는 설(說) 1편, 잠(箴) 1편, 응제문(應製文) 17편, 상량문 2편, 권15는 잡저 1편, 권16은 잡저 2편, 제문 15편, 권17은 제문 8편, 축문 1편, 애사(哀辭) 3편, 비명 6편, 권18은 비명 4편, 묘갈 8편, 권19는 묘갈 13편, 권20은 묘지명 17편, 권21은 묘표 15편, 권22는 행장 5편, 시장(諡狀) 7편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중 실용적 문장이 10권 가까이 차지하고 있어, 저자의 사회적 위치를 가늠하게 한다. 특히, 정치현장에서 실질적 기능을 점하고 있었던 문서류 중 〈위진사이덕보등소하제생재진변무소 爲進士李德普等疏下諸生再陳辨誣疏〉·〈청문출죄인최석정원찬합계 請門黜罪人崔錫鼎遠竄合啓〉·〈청전참의조태억삭탈관작계 請前參議趙泰億削奪官爵啓〉 등은 노론(老論)의 입장에서 소론(少論)의 비위사실을 신랄하게 공격한 것이다. 저자의 상소문체는 당시에 이름 높았던 것으로, 성균관유생 시절부터 후대 고위 관직을 역임할 때까지 노론계의 당론을 대변하였다. 또한 제문·축문·신도비명·행장 등도 노론계 정객이나 학자들과 연관된 것이 주종을 이룬다. 반면 서(書)에서는 자신의 철학적 입장을 밝히기도 하였다. 〈답한장령원진 答韓掌令元震〉에서는 심성론(心性論)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물은 호론(湖論)의 대표적 학자인 한원진에게 지나친 격론을 피하라고 권고하였다. 객기에 흐르고 승부에 집착하여서 토론하는 양측에 모두 해롭게 되는 결과를 지적하고, 구체적인 철학적 쟁점을 밝히는 일은 사양하였다. 또한 종제(從弟)인 봉구(鳳九)와 왕래한 편지는 모두 18편에 이르러 주목된다. 정엽(鄭曄)의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에서 의심나는 부분에 대하여 원문을 열거하고 자신의 견해를 피력하기도 하였다. 윤봉구는 강문팔학사(江門八學士)의 일인으로 이름 높은 성리학자인만큼 성리학에 대한 논의가 많다. 서(序)·기(記) 등에서는 그의 문장력을 엿볼 수 있다. 〈송조사취명규왕근벽성서 送趙士聚明奎往覲碧城序〉에는 벽성의 적지(謫地)로 아버지를 찾아가는 젊은이에게 선비의 ‘특립자수(特立自守)’하는 도리를 면려하는 내용이 곡진하게 표현되었다. 〈분충서난록서 奮忠〈서0x65D1〉難錄序〉에서는 사명당(四溟堂)이 임진왜란에 승군(僧軍)을 조직하여 국난을 구제할 수 있었던 사상적 근거를 유가(儒家)의 입장에서 따지고 책의 성격을 밝혔다. 〈탐라후풍기 耽羅候風記〉에서는 1728년(영조 4) 49세에 제주도로 유배되고, 이듬해 육지로 이송되는 과정에서 항해할 때 자연조건에 절대 순응하면서 극히 조심하였기 때문에 재난을 모면할 수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경험으로부터 연상되는 환로(宦路)에서의 처세방법에 대한 감회를 기술하고 있다. 〈미발설 未發說〉은 성리학에 대한 견해를 가장 적극적으로 개진한 글로, 저자의 주변 인물들이 주장하였던 인물성이론(人物性異論)의 호론적(湖論的) 입장을 엿볼 수 있다. 또한 〈학역천견 學易淺見〉은 총 53장의 전문적인 학술저작이다. 삭주(朔州)와 영도(瀛島:제주도)에 유배되었을 때 역학(易學)을 연구한 결과, 특히 〈계몽도설 啓蒙圖說〉 중 의심나는 곳의 문제점을 들어 견해를 밝혔다. 주자(朱子)와 옥재호씨(玉齋胡氏)의 견해를 비교하고 이황(李滉)의 〈계몽전의 啓蒙傳疑〉 중의 도설을 참고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진 작업이다. 그런데 여기서 저본으로 거론된 〈계몽도설〉은 서명응(徐命膺)이 1772년(영조 48)에 주자의 〈역학계몽 易學啓蒙〉을 부연하여 도해(圖解)하였던 책일 수는 없으며, 주자의 계통을 이은 송인(宋人) 호방평(胡方平)의 〈역학계몽통석 易學啓蒙通釋〉과 관련된 것으로, 당시에 이미 유행하였던 책이라 추측된다. 이 저작은 거론된 여러 서책을 함께 참고하면 우리나라의 역학연구사(易學硏究史)를 이해하는 데 좋은 자료가 된다. 장서각도서·규장각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金乾坤〉
청구번호_정렬01_K4-6614
자료분류고서 > 장서각 본도서 > 한국본 > 集部 > 別集類 > 詩文
CLASSCODEJAKD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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