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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봉유고(白蓬遺稿)

자료명 백봉유고(白蓬遺稿) 저자 윤종지(조선)(尹宗之(朝鮮)) 찬(撰)
자료명(이칭) 백봉유고(白篷遺稿) 저자(이칭) 尹宗之(朝鮮) 撰
청구기호 K4-6042 MF번호 MF35-2274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集部/別集類/詩文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전자도서관(SJ_LIB)
서지 장서각기록유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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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제공처전자도서관
번호113754
서명白蓬遺稿
저자尹宗之(朝鮮) 撰
판사항寫本
간사사항[寫年未詳]
청구번호K4-6042
MF번호MF35-2274
형태사항線裝 2卷1冊 :四周單邊, 半郭 23.6 × 16 ㎝, 烏絲欄, 半葉 10行20字, 無版心 ;32.2 × 21.9 ㎝
인기印 : 尹氏得觀士賓, 李王家圖書之章 外1種
안내정보
해제~ 09-1167 * 백봉유고〈1〉 (白〈봉0x6345〉遺稿) 조선 중기의 문신 윤종지(尹宗之, 1597∼?)의 시문집. 2권 1책. 필사본. 저자의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임종(林宗), 호는 백봉(白〈봉0x6345〉). 아버지는 민 (敏)이며, 어머니는 전주이씨(全州李氏)로 부윤(府尹) 집(楫)의 딸이다. 그는 선조 때의 명신 윤근수(尹根壽)의 손자이며 영의정 윤두수(尹斗壽)의 종손자로서 가학(家學)을 전수받아 성리학에 조예가 있었고 사장(詞章)에도 뛰어났다. 1618년 (광해군 10) 사마시에 합격하였고 문과에는 뜻을 이루지 못했으나, 명문가의 자제로서 음직(蔭職)에 발탁되었다. 병자호란 때 영남으로 피신하여 불우하게 살다가 1649년(효종 즉위년) 재등용되어 곡산현감·대구부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 책은 필사자와 그 연대가 미상이다. 권두에 이성조(李聖肇)의 서문이 있고, 권1에 시 69수, 서(書)·서(序)·상량문 각 1편, 제문 7편, 행장 2편, 독사잡지(讀史雜識) 1편, 권2에 소수록(小睡錄) 1편, 부록에 효유첩(曉諭帖)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서(書)는 강원도관찰사에게 금성(金城 : 지금의 김화)지방의 방어대책을 건의한 내용으로, 부족한 군사의 수를 증원하여 성첩(城堞) 수비의 허점을 보완할 것을 논하였다, 〈독사잡지〉는 〈한서〉에 기술된 주요인물들의 사적을 간추려 적고 그 잘잘못을 논평한 인물평전이다. 〈소수록〉 역시 태조로부터 효종에 이르기까지의 역사적 사실과 인물평론을 수록한 것인데, 특히 조선 왕실의 종계변무 (宗系辨誣)와 관련된 사건의 전말이 비교적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 그의 역사에 대한 안목은 대체로 감계사관(鑑戒史觀)의 수준에 머물러 있지만 관심은 상당히 컸던 것으로 보인다. 〈효유첩〉은 그가 수령(守令)으로 재직하고 있을 때, 국가에서 시행하는 양전사업(量田事業)의 취지를 각 면의 백성들에게 설명하고 그들의 협조를 요청한 훈시문이다. 여기서 그는 양전사업이 국가의 수취 증대에 목적을 둔 것이 아니라, 백성들의 조세부담을 고르게 하고 토지의 등급에 따라 차등 과세함으로써 세정의 부조리를 시정하려는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여기에는 또 양전에 따른 사목(事目) 6조가 포함되어 있어 조선 후기 양전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다. 장서각도서에 있다. 〈李弼龍〉
청구번호_정렬01_K4-6042
자료분류고서 > 장서각 본도서 > 한국본 > 集部 > 別集類 > 詩文
CLASSCODEJAKDB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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