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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조보첩(國朝譜牒)

자료명 국조보첩(國朝譜牒) 저자 종부시(宗簿寺) 편(編)
자료명(이칭) 國朝譜牒 저자(이칭) 宗簿寺(朝鮮) 編
청구기호 K2-910 MF번호 MF35-1886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史部/傳記類/璿源譜/系譜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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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작성시기 1764(영조 40년)
· 청구기호 K2-910
· 마이크로필름 MF35-1886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종부시(宗簿寺) 편(編)

형태사항

· 크기(cm) 39.3 X 24.2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8.7×18.2c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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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영조 재위 시 宗簿寺에서 全州李氏의 始祖인 新羅 司空 李翰으로부터 영조까지 조선 왕실의 宗統을 중심으로 기록한 왕실 보첩이다.
서지사항
앞표지에 주색 비단 테두리를 두른 흰색 有紋 비단 제첨에 서명을 필사하였으며, 모란넝쿨문이 있는 청색 비단을 冊衣로 사용하였다. 空隔紙와 본문 모두 두꺼운 壯紙를 사용하였으며, 上下內向三葉花紋魚尾를 그린 주홍색 필사 인찰공책지에 필사하였다. 본서는 왕세손 저하(후일의 정조)가 특명으로 1764년(甲申) 2월 20일 효장세자의 뒤를 이었다는 사실과, 세손빈 청풍김씨효종의 潛邸였던 於義洞 本宮에서 임오년에 가례를 행하고, 세손빈으로 책봉되었다는 기록으로 끝이 난다. 그리고 영조의 서11녀 화령옹주가 가례를 올리기 전으로 기록되어 있다. 화령옹주1764년(영조 40) 12월 20일에 靑城尉 沈能建과 가례를 올린다. 이를 통해 본서가 1764년에 작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체제 및 내용
본서는 1679년(숙종 5) 이후 진행된 왕실 족보의 대대적인 수정 작업의 연장선상에서 나온 것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국조보첩』은 1681년(숙종 7) 8월 초에 수정이 마무리된 『國朝御牒』의 체제를 따랐다. 1680년(숙종 6)에 간행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어첩으로서 조선 전기의 양식을 따른 것으로 보이는 장서각 소장 『朝鮮國譜』(K2-1077)의 장정 형태와 기재 방식을 비교해 보면 조선시대 어첩의 변화상을 밝힐 수 있다. 『조선국보』의 경우, 11절 22면의 절첩형 보첩으로 장정되었고, 크기도 48×29cm이다.
본서는 크게 先系와 世系로 구분된다. 첫째, 선계의 수록 대상은 시조에서부터 17세 將軍 陽茂(穆祖의 父)까지이다. 先祖의 諱와 관직명만을 주로 기록하였다. 특히 시조와 16세, 17세의 경우에만 배우자의 본관, 부의 관직과 이름 등의 기록이 보인다. 둘째, 세계의 수록 대상은 18세 穆祖로부터 작성 당시의 주상 전하(영조)까지이다. 각 왕별로 왕과 비, 왕의 자녀 순으로 기록하였다. 왕의 경우, 휘, 자, 존호, 생년 일시와 탄생 장소, 왕세자 책봉일, 즉위일, 승하 일시와 승하 장소, 재위년, 추존 시기, 춘추, 시호, 총 자녀 수, 능호 등을 기재했다. 왕비의 경우, 존호, 본관, 부의 관직과 이름, 생년과 책봉일, 승하 일시와 승하 장소, 춘추, 시호, 소생 자녀수, 능호 등을 기록하였다. 왕자녀의 경우, 왕위 계승자를 먼저 적고, 그다음으로 嫡庶를 구분한 후 先男後女 방식으로 작성하였다. 대군, 공주, 군, 옹주의 순으로 출생 순서를 따라 기록하였으며, 반드시 생모의 신분을 밝혔다. 대군과 군의 경우, 출생 순서 밑에 이름과 봉작명을 적었다. 공주와 옹주의 경우, 출생 순서와 봉작명 이외에 부마의 성명과 부마의 尉號를 기록하고 있다. 기록한 내용이 불확실한 경우에는 따로 細主를 달아 ‘臣謹按’이라 하며 典據를 밝혀 논증했다.
영조 재위 시 2종의 『국조보첩』이 작성되었는데, 이 둘 사이에 30여 년 정도의 시차가 존재한다. 두 보첩의 내용과 기재 방식을 비교해 본 결과, 1764년에 작성된 본서에는 새로운 항목을 추가하거나 기존 항목의 기재 내용을 보다 구체화하는 보완 작업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효종대왕의 경우 ‘竹梧’라는 호가 추가되었다. 그리고 왕실 가족 구성원의 생애사적 사건이 발생한 해당 간지 뒤에 왕력을 작은 글씨로 기록하도록 하였다. 기존에 탄강 연월일만 적던 방식에서 탄강 장소를 추적하여 ‘경행방 본궁 인조잠저’라고 보다 구체적으로 밝혔다. 입학 시기와 즉위 장소도 추가되었다. 인선왕후 장씨의 경우에도 같은 방식으로 사실을 보다 구체적으로 기록하고자 하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러한 이유로 분량이 28장에서 36장으로 다소 늘어났다. 또한 보첩에 기록된 인물의 경우, 정치적 상황이나 지위의 변화에 따라 기록 방식에 있어서 차이가 나타났다. 효종의 이복동생인 숭선군, 낙선군, 효명옹주의 생모를 ‘以上趙出’이라고 기록했던 방식이 이 보첩에서는 ‘以上 廢趙貴人出’로 바뀌었다. 그리고 효종의 서1녀인 숙녕옹주의 생모인 이씨가 ‘귀인이씨’에서 ‘안빈이씨’로 그사이에 후궁 최고의 품계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국조보첩』(奎2360의 2, 奎2361)에도 같은 내용이 기술되어 있다.
특성 및 가치
조선시대 왕실 가족의 존재 양상을 시대별로 한눈에 파악할 수 있으므로 조선시대 왕실 가족사 연구와 전주이씨 璿派 가문 연구에 기초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URL
왕실의 족보」, 김영심, 『규장각 소장 왕실자료 해제·해설집 1』, 서울대학교 규장각, 2005.
김일환·원창애·홍우의, 『장서각 소장 왕실보첩류 목록 및 해제』, 민속원, 2010.

집필자

김지영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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