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려선생연보(草廬先生年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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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본정보 해제 xml
일반사항
· 사부분류 | 사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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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시기 | 1805(순조 5년) |
· 청구기호 | K2-841 |
· 마이크로필름 | MF35-1093~1094 |
· 소장정보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주체 - 인물
역할 | 인명 | 설명 | 생몰년 | 신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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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단성(李端誠) 편(編) |
형태사항
· 크기(cm) | 32.8 X 2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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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판본 | 목활자본(木活字本) |
· 장정 | 선장(線裝) |
· 수량 | 4권(卷) 2책(冊) |
· 판식 | 반곽(半郭) 22.4×16.2cm |
· 인장 |
李王家圖書之章, 帝室圖書之章, 舊宮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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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세정보
내용
정의
17세기 문신이자 학자인 草廬 李惟泰(1607~1684)의 연보이다.서지사항
表紙書名, 書根題는 ‘草廬年譜’, 版心題는 ‘草廬先生年譜’이다. 표지 서명 하단에는 冊次가 ‘乾·坤’으로 필사되어 있으며, 목판 四周를 두른 종이 題籤에 필사하였다. 書腦 하단에 ‘共二’라는 기록이 필사되어 있다. 書根에는 서근제 및 책차가 기재되어 있다. 卷末 年譜의 기록을 통해 본서가 1805년(순조 5)에 간행되었음을 알 수 있다.체제 및 내용
본 연보는 3단계를 거쳐 1805년 6대손 李在元에 의해 최종 완성되었다. 1단계는 손자 李端誠이 편집하였으나 최종 정리를 마무리되지 못한 채 그의 사망과 함께 중단되었고, 2단계는 1770년대경에 任聖周(1711~1788)와 金砥行(1716~1774)이 節次의 修潤에 참여하였으나 내용이 충분하지 못하였다. 그래서 3단계에서 이재원이 이유태의 遺稿와 다른 문헌의 기록에서 근거가 있는 것을 다시 조사하여 빠지고 소략한 부분을 보완하여 완성하였다. 연보 권4 마지막에 일종의 識文이 있는데 연보 간행 경위를 간략하게 서술해 놓았다. 이유태의 문집인 『草廬集』은 그 뒤 1865년에 간행되었다. 권별 수록 내용을 살펴보면, 권1은 1607~1658년(선조 40~효종 9), 권2는 1659~1664년(현종 1~5), 권3은 1665~1674년(현종 6~15)까지이며, 권4는 1675~1684년(숙종 1~10)까지 수록하고 사후 호남 유생이 錦山에 서원 건립을 요청한 상소 내용 등이 각각 수록되어 있다. 연보의 기술은 상소와 편지의 중요한 부분을 그대로 인용하는 방식이다.이유태는 金長生과 金集 부자의 문인으로 宋時烈, 宋浚吉, 尹宣擧, 兪棨 등 호서 지역의 학자들과 폭넓게 교유하였다. 1674년의 甲寅禮訟에서 服制說을 올렸다가 영변에 유배되었는데, 1679년(숙종 5) 吳始壽가 “이유태는 議禮의 잘못을 뒤늦게 깨달았다.”고 해명함으로써 석방된 뒤 예론의 의견차이로 송시열과 그의 제자 및 후손들과 갈등하였다.
특성 및 가치
호서 지역 유학자인 이유태의 생애와 예론을 이해하는 데 기초 자료이며, 송시열과의 갈등을 연구하는 데도 참고가 되는 자료이다.집필자
이동인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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