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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융청행행등록(摠戎廳幸行謄錄)

자료명 총융청행행등록(摠戎廳幸行謄錄) 저자 총융청(摠戎廳) 찬(撰)
자료명(이칭) 총융청행행등록(摠戎廳幸行謄錄) , 1824~1841년 총융청행행등록(摠戎廳幸行謄錄) 저자(이칭) 총위영 , 총융청(조선)(摠戎廳(朝鮮)) 편(編)
청구기호 K2-3383 MF번호 MF35-598
유형분류 고서/등록 주제분류 史部/政書類/軍政
수집분류 왕실/고서/한국본 자료제공처 장서각(SJ_JSG)
서지 장서각 장서각기록유산 디지털아카이브 전자도서관 해제 장서각 장서각기록유산 전자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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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사부분류 사부
· 서비스분류 군영등록
· 작성시기 1824(순조 24년)
· 청구기호 K2-3383
· 마이크로필름 MF35-598
· 기록시기 1824~1841年(純祖 24~憲宗 7)
· 소장정보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가치정보 귀중본

작성주체 - 기관단체

역할 단체/기관명 담당자 구분
총융청(摠戎廳) 찬(撰)

형태사항

· 크기(cm) 31.5 X 21.4
· 판본 필사본(筆寫本)
· 장정 선장(線裝)
· 수량 1책(冊)
· 판식 반곽(半郭) 24.5×17.4㎝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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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24년(순조 24) 2월부터 1841년(헌종 7) 8월까지 총융청이 국왕의 행행을 준비하고 참여한 내용을 정리한 책이다.
서지사항
표지 서명은 ‘摠戎廳幸行謄錄’이다. 斜格卍字 문양이 있는 표지에 서명이 묵서되었다. 표시 서명 하단에 단권 표시인 ‘全’이 묵서되었다. 서근에는 서명, 왕조, ‘全’이 묵서되었다. 표지 우측 상단에 ‘自純祖 甲申(1824) 二月 至憲宗 辛丑(1841) 八月’이라고 기재되어 있어 필사년을 추정할 수 있다. 四周單邊에 上內向二葉花紋魚尾인 인찰공책지에 본문의 내용이 필사되었다. 본문에서는 대두법을 적용하여 광곽 위에 필사하기도 하였다. 행자수는 10行이고 자수가 일정하지 않다. 본문 중에 刀削하거나 빠진 글자를 묵서하여 수정한 흔적이 있다.
체제 및 내용
순조 대부터 헌종 대까지 총융청이 국왕의 행행 시 동원되던 과정과 내용이 일자별로 기재되어 있다. 1824년 2월부터 1841년 8월 사이에 있었던 순조헌종의 행행에 대한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책명에서 알 수 있듯이 총융청에서 담당한 행행의 내용을 모아 놓은 것이다. 자료의 대부분은 순조의 행행이 차지하고 있다. 순조의 행행은 1824년부터 순조가 승하하는 1834년의 9월까지 나타나고 있어서 10여 년간 진행된 행행의 변화를 조사할 수 있는 자료이다. 그리고 헌종에 대한 기록은 1839~1841년(헌종 5~7)이 있다. 책의 주요 내용은 행행 절차, 행행 때의 수비 방법 및 호위 군병 규모, 궁궐 및 도성 수비를 위한 留都大將의 선발 등이다. 행행지의 대부분은 순조의 생모인 유빈 박씨가 묻힌 휘경원이다. 휘경원 외에도 健元陵, 明陵, 元陵, 弘陵, 懿陵, 綏陵, 翼陵, 延慶墓 등도 행행을 하고 있으나 정기적인 행행 목적지는 휘경원이었다. 행행 시기는 2~3월, 8~9월이었으므로 이때의 기사 내용이 대부분이다.
본문의 기사는 陵幸, 園幸 등의 擧動이 일정한 시기, 일정한 절차에 의해 이루어지기 때문에 공통적인 내용이 반복적으로 기술되어 있다. 물론 행행에 동원되는 총융청 군병 수의 증감, 해당 관서의 변경 등이 일부 나타나기도 하지만 37년간에 걸친 행행 기록은 대부분 유사하다. 예컨대 행행의 진행 과정을 정리해 본다면 7개로 응축된다.
「擇日」은 예조에서 陵幸 할 곳과 택일 등을 보고함, 「軍令」은 병조에서 궁궐부터 행행지까지의 거리와 당일 환궁의 여부를 보고함, 隨駕軍과 留營軍의 「선정」은 병조에서 행행에 참가할 군병을 보고함, 留都軍의 領率자 선정, 隨駕軍兵의 복색과 군율, 절차, 출환궁 시의 도로 사항 등을 정함, 幸行 전일 각 담당 부서로 傳令, 행행 시행 등을 정리하였다.
행행 시 이용한 길도 한 번 정해진 코스가 변경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이용되었다. 예컨대 이 책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던 휘경원 행행을 보면, 돈화문-돈령부 앞길-把子廛 石橋 -宗廟洞 앞길-蓮池洞 石橋 -於義洞 입구 東橋-興仁門-東關王廟 뒷길-普濟院 앞길-冷川 安樂峴 -園所洞 입구-휘경원으로 가는 노선이었다. 행행로와 함께 척후 및 복병도 한 번 정해지면 동일한 곳에 계속 지정되었다. 척후와 복병의 배치는 어가에서 10리 밖을 기준으로 삼았다. 1826년(순조 26) 8월에 숙종明陵 행행 때 척후와 복병 상황을 보면 고양의 척후는 老古山, 木稀峯, 道乃洞山, 望月山, 礪石峴 등 5곳에 領將 1명과 군병 3명이 배정되었다. 복병은 黔巖西門 밖 사잇길, 西門 밖 아래 사잇길, 新村 앞 사잇길, 龍峴 앞 사잇길, 道乃洞 사잇길, 龍頭里 앞 사잇길 등 6곳에 領將 1명과 군병 7명이 배정되었다. 따라서 이 자료가 등록이기는 하지만 그 내용은 규정과 같이 지속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나고 있다. 다만 특수한 경우도 나타난다. 예컨대 총융청에서는 한강을 건너는 경우에 배다리[舟橋]를 관리하기도 하였다. 총융사가 주사대장으로 임명되었고, 국왕의 행행 하루 전에 노량진으로 가서 주사에 관한 일을 통솔했다가 국왕의 일행이 한강을 건너면 信箭을 기다린 후 解嚴했다.
특성 및 가치
조선 후기 국왕의 행행에서 총융청 군병의 동원과 시위 체제 및 국왕이 도성에 부재할 때의 대비 상황을 보여주는 군제사적 자료 성격을 보인다. 특히 국왕의 행행 이동로와 총융청 군병의 배치 지역을 알 수 있어서 도성 내 주요 교통로와 방어처를 연구하는 데 대표적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육군본부 군사연구소, 『한국군사사』7·8, 2012.
이왕무, 「조선 후기 국왕의 扈衛와 幸行 : 『摠戎廳幸行謄錄』을 중심으로」, 『장서각』7, 2002.
이태진, 『조선후기의 정치와 군영제 변천』, 한국연구원, 1985.
차문섭, 『조선시대 군사관계연구』, 단국대학교, 1996.

집필자

이왕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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