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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

자료명 안동권씨 성화보(安東權氏 成化譜) 저자 서거정 편(徐居正 編)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PB10B 127A MF번호 MF35-9706~9707
유형분류 고서/기타 주제분류 기타
수집분류 민간/구입본/고서 자료제공처 디지털아카이브(SJ_ARC_AA)
서지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이미지 디지털아카이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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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서명안동권씨 성화보
한자서명安東權氏 成化譜
편저자한글서거정 편
편저자한자徐居正 編
표지제한글안동권씨 성화보
표지제한자安東權氏 成化譜
간행년(왕력)昭和4
간행년(서기력)1629 - *
간행처成化譜重刊所
언어한문
유형고도서
판사항石印本
형태서지不分卷2冊; 34.4 × 22.6cm
내용주기重刊序 : 歲戊辰(1928) … 行秘書監承(權)丙燮謹序 跋 : 蒼龍戊辰(1928) … 三十三世孫(權)主事泰峻略記 識 : 時甲申(1884) … (權)靖夏識 刊記 : 昭和四年(1929)五月三十日慶北安東郡西後面城谷洞陵洞齋舍內成化譜重刊所發行
인기
청구기호B10B 127A
소장처한국정신문화연구원
간략내용양촌 권근의 아들 권제가 가보소첩을 만들었는데 권근의 손자 권람과 고종사촌인 서거정, 권씨의 외손인 상주판관 박원창, 대구부사 최호원이 자료를 보충하고 경상감사 윤호가 안동부에서 목판으로 간행한 족보이다.
MFMF35-9706~9707
등록번호44024560v1 44024561v2
대표서명권수제(권두서명)에 의함
종이재질
자료유형계보족보류

해제정보

해제저자한글허흥식
해제작성언어국한문 혼용
한자서명安東權氏 成化譜 解題
한글서명안동권씨 성화보
간행처成化譜重刊所
해제저자한자허흥식
해제내용
安東權氏世譜(成化譜) 해제
허흥식
[1]
머리말
1. 서명과 편집과정
2. 서술상의 특징
3. 사료로서 가치
맺음말
머리말
氏族의 기원과 전개를 정리한 書冊을 族譜라 널리 불리며, 그밖에도 世譜와 氏譜라고도 한다. 성씨의 포괄 정도에 따라 家乘과 派譜, 그리고 大同譜라고도 하고, 간행연도의 干支를 붙여 譜라고도 불리기도 한다. 모든 성씨를 모아서 만든 족보를 萬姓譜라 하며, 우리 나라에서 조선후기 이래 오늘날까지 많은 족보가 간행되었다.
족보는 기원이 오래지만 왕실의 종실이나 사대부에서 가승의 형태로 출발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왕실의 족보와 사족의 가승이 존재하였다. 조선초에도 가승에서 족보로 과도기에 있는 族圖가 몇몇 가문과 불교의 法統을 적은 宗派圖가 있었고 극소수가 현존한다. 성리학에서도 학문의 계승을 밝힌 계보를 道統으로 소중하게 여겼다.
고려후기의 士族이 조선전기의 지배층으로 계승되는 사례가 많았고, 性理學이 심화되면서 父系意識이 족보의 편찬을 더욱 촉진시켰다. 조선 전기의 족보는 많은 가문에서 편찬되지 않았고 수효도 적었다. 형태와 기록된 家系의 내용도 일반적으로 알려진 조선후기의 족보와는 사뭇 달랐다. 조선후기의 족보와 가장 가까운 모습을 보여주는 조선전기의 자료는 1476년 간행된 安東權氏世譜(성화보라 불림)와 1565년 간행된 文化柳氏世譜(嘉靖譜라 불림)가 대표적 사례이다. 이 두 가지 족보가 차지하는 중요성은 가장 오래된 족보라는 단순한 의미도 있지만, 그보다 만성보에 가까운 지배층이 가지던 조선전기의 수평적 사고의 잔재로서 의미를 강조할 필요가 있다. 이 두 가지 족보에 대한 명칭은 成化譜나 嘉靖譜라 부르기에 마땅하지 않다는 반대도 예상된다. 그러나 가문에서도 이를 명시한 복간본에 이를 표시할 정도로 관습화되었으므로 이를 따르고자 한다. 필자는 1476년판 安東權氏世譜와 1565년판 文化柳氏世譜라 부르고 싶었으나 후손의 논문이나 복간에서 사용한 표현을 존중하고자 이를 버리지 않았다.
성화보는 가정보와 상통하는 서술형태가 많다. 두 가지 자료는 지배층의 과반수를 반영할 정도로 萬姓譜에 가깝다. 차이점으로 가정보는 성화보보다 90년 늦게 완성되었으므로 수록된 인명의 수효가 방대하고, 편찬당시에는 성리학이 심화되기 시작하여 변형된 사회구조의 여러 모습이 나타났다. 조선전기의 지배층과 사회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 성화보의 편집과정과 내용상의 특성과 변화에 대한 이해를 선행할 필요가 있다.
[2]
1. 서명과 편집 과정
안동권씨성화보의 본래 명칭은 安東權氏世譜이고 이후의 다른 족보와 구분하기 위하여 成化安東權氏世譜라고 서명을 붙여 축소복사하고, 太師權公實紀를 부록하여 유통시켰다.『成化安東權氏世譜』출판사와 출간연대는 미상. 1970년대 후반 또는 1980년대 초반으로 추정됨.
안동권씨의 족보는 최초로 陽村 權近의 아들 踶(1337-1445)가 家譜小牒을 만들고 權近의 孫子 擥(1416-1465)과 姑從四寸인 徐居正, 권씨 외손인 尙州判官 朴元昌, 大丘府使 崔灝元이 자료를 더욱 보충하고 慶尙監司 尹壕가 안동부에서 인쇄하여 1476년에 성화보가 출현하였다.
성화보는 이후에 인본도 드물어졌으므로 1929년에 다시 복간하였고 판목이 지금도 안동서후면 권씨 재실에 보관중이다. 국내에 성화보의 원본은 서울대도서관에 유일본이 전하고고 있으며, 이를 복간본과 讎校한 결과 차이점이 적지 않게 지적되었다. 權寧大 「成化譜攷」『論文集』大韓民國學術院, 人文科學 20,1981.
安東權氏는 太師 權幸을 시조로 신라의 古昌郡에서 고려 태조를 도와 공신에 올랐던 기원이 오랜 성씨이다. 세종실록에는 土姓으로 올라 있지만 다른 곳의 분파는 적다. 다만 醴泉權氏는 본래 荀씨였으나 왕명과 같으므로 외조부의 성인 권씨를 따랐으므로 동성동본이면서도 내용상 판이하게 다르다.
[3]
2. 서술상의 특징
성화보의 서술은 안동권씨의 성쇠와 사상과 관련된 시대별 사회구조를 반영하였다. 족보의 기원이 조선초까지 소급되는 다른 성씨에서도 왕족을 제외하면 고려전기의 가계는 거의 단일한 부계로 계승되었다. 軍功을 세우거나 과거에 급제한 고급관인을 배출하여 起家하면 비로소 가계가 확대하였고 가승이 마련되었다.
안동권씨의 기원은 족보의 시조보다 앞서는 전설상의 시대가 있겠으나 기록상으로는 고려초를 소급하지 못하였다. 시조 太師 權幸은 공신이었지만 9대까지는 입사자를 배출하지 못하였고 單系의 가승으로 유지된 시기였다. 고려중기에 급제한 權適이 고급관인으로 사서에 올라 있으나, 그와 그의 후손은 어느 족보에도 실리지 않았다. 시조로부터 10대에 이르러 守平이 무반으로 무신집권기에 立身하였고, 그의 아들 韙와 손 㫜, 그리고 증손 溥에 이르기까지 계속 과거에 급제하여 세족화하고, 당시의 九封君이 배출된 명문으로 부상하였다.
안동권씨는 급제하여 起家한 이후와 이전으로 크게 대별된다. 급제전에는 지역내혼은 물론이고 심지어 동성동본혼이 존재하였으나 이후에는 본관내혼을 벗어나 전국의 명문들과 통혼권을 넓혀 갔다. 원 나라의 質子와 貢女 등으로 원 제실과의 관계를 이용하여 부원세력과 제휴하면서 더욱 세족으로 성장하였으나 고려말에는 정변에 휩싸여 가문이 위축되는 시기도 나타났다.
권씨는 최근까지 각지에 집성촌이 많으나 분관한 곳은 없다. 분관이란 몽고와 항전기간에 많았으며, 권씨는 무신집권기에 출사한 이외에 고려시대에 다른 지역으로 집단 이주한 사례는 없었다고 추측된다.
[4]
3. 사료로서 가치
성화보는 고려전기의 지배층의 연구에 도움되는 요소가 있지만 고려후기부터 지배층과 통혼권을 넓히면서 명문거족의 內外孫을 포함하였다. 족보에는 자녀의 성별에 대한 기재가 출생순으로 수록되었고 內孫의 계승은 물론 外孫의 계승도 편찬시까지 성실하게 수록함으로써 고려후기부터 조선전기까지 200년간의 지배층이 망라된 만성보라고 불릴만하다.
출가승이나 재혼한 후부에 대해서도 수록하였다. 配位에 대한 기록이 없으므로 아쉬움이 있지만 가정보보다 약 90년 앞서 간행되었으므로 가정보의 2할정도인 9120(중복된 수효를 1인으로 계산)인이 수록되었고, 이 가운데 1할인 967인만이 안동권씨이고 나머지는 모두 외손이다. 안동권씨도 남성이 여성보다 거의 갑절에 육박하며 남성은 540인이고, 여성은 327인이다. 이로 보면 성화보의 기록도 다른 족보나 호적과 마찬가지로 아주 정확한 자료라고 말하기 어렵다.
성화보는 범례를 설정하지 않았으나 일관된 기준으로 수록하였고, 해당 인물이 살던 시대상도 적지 않게 반영하였다. 하나는 외손을 포함하는 공신음서의 범위를 암시한다. 다음으로 여성의 지위가 현대사회와 상통할 정도로 위상이 높았음을 반영한다. 기재순서와 재가한 여성의 후부를 기록하여, 재가를 수치로 여기지 않았던 사회의식을 반영한다.
성화보에 실린 마지막 세대는 가정보보다 90년 앞서므로 이후 사회구조의 변모가 반영되지 않았다. 가정보에는 出系한 사실이 마지막 세대의 생부 다음에 기록되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나 성화보에는 이러한 사례가 없다. 이로 보면 성화보는 가정보보다 90년이 앞서는 오랜 족보라는 장점은 있으나 중세사회의 변화하는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한계점이 있다.
성화보는 가정보와 함께 고려와 조선 전기의 사회를 규명하기 위한 중요한 자료의 하나이다. 이에 대한 정리는 고려와 조선의 지배층의 속성을 이해하기 위하여 국내에서 자료의 복간은 물론 국외에서도 깊은 관심과 전산화에 관심을 기울였다. Edward. W. Wagner 「1476年 安東權氏族譜와 1565年 文化柳氏族譜-그 性格과 意味에 대한 考察」『石堂論叢』15, 1989.
성화보는 만성보와 상통하므로 이를 전산화하여 조선 후기의 다른 족보를 연결시킨다면 사회사 자료로서 확장된 영역이 마련된다는 장점이 있다.
[5]
맺 음 말
안동권씨 성화보는 1476년(成宗 7년)에 안동권씨 양촌 권근의 자손 양대에 걸쳐 공들여 수록하였다. 완성단계에는 서거정을 비롯한 외손도 참여하여 도합 30년의 기간을 들여 완성한 萬姓譜이다. 1929년 복간본과 목판의 일부가 현존하고 성화보의 원본은 규장각에 유일본이 전하고 있으나 낡아서 읽기 어려운 부분도 조금 있다. 근래에 이를 복간하여 학계에 보급하였으나 서문과 간기가 없으므로 아쉽다. 이 책은 중복되는 인명을 1인으로 계산하면 9,000명에 가깝고, 1할 가량을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안동권씨가 아닌 외손이다.
이 족보는 안동권씨를 가장 충실하게 수록하였지만 다른 가문에 대해서도 고려후기에 지배층을 배출한 다수를 망라하였고, 조선전기 지배층의 7할을 담았다. 이 족보는 유일본이 복사되었으므로 판독하기 어려운 글자도 많고, 僻字가 많아 이를 전산화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으리라 예상된다. 또한 남성의 配位에 대한 기록이 없고, 여성의 배위는 충실한 편이지만 본관이 밝혀져 있지 않다.
여성의 배위에 성씨나 이름이 제외되거나 남성의 경우에도 이름이 빠진 경우도 있다. 이와 같이 부실한 부분에 대해서는 그 원인을 밝히고, 이를 보충하여 좀더 향상된 자료로 활용할 기초를 다지는 작업이 뒷받침되어야 하겠다. 또한 각 시대와 여러 국가의 계보서를 비교하여 이 족보의 우수성과 특징을 규명하는 작업도 계속될 필요가 있다고 하겠다.
현대의 족보는 전통시대에 지배층이나 신분을 확인하는 용도와는 다르다. 이를 학술상의 자료로 이용하는 한편 현대사회에서 급격한 전통사회의 붕괴를 대비한 처방으로도 활용할 가치가 있다. 특히 우리 나라는 분단으로 이산가족이 많았고, 지구촌 시대에 해외의 이주가 잦으므로 개인의 소외를 극복하고 뿌리를 찾아 자신의 정체성을 확인하는 자료로서도 의미를 찾을 수 있다.(2002,8,19)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8.13
해제초기작성
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제작성/형식변환

책차정보

책차번호관련내용
001 등록번호: 44024560v1 / 시작이미지: JE_A_55020_001_000011 / 종료이미지: JE_A_55020_001_000632 /
002 소장처: 安山 晉州柳氏 / MF: MF35-9934-41 / 시작이미지: JE_A_55020_002_000641 / 종료이미지: JE_A_55020_002_001182 /
003 등록번호: 44024561v2 / 시작이미지: JE_A_55020_003_001191 / 종료이미지: JE_A_55020_003_00192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