준호구(準戶口)
· 서지정보 서지 xml
한글문서명 | 준호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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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문서명 | 準戶口 |
이명(한글) | |
이명(한자) | |
수취(한글) | 대흥군 |
수취(한자) | 大興郡 |
발급(한글) | 박희갑 |
발급(한자) | 朴羲甲 |
찬자(한글) | 미상 |
찬자(한자) | 미상 |
발급목적 | 大興郡에서 발급한 朴羲甲의 60세시 준호구 |
간행년(서기력) | 純祖7 1807 - |
유형 | 고문서 |
크기 | 65x62cm |
관인수 | |
청구기호 | |
소장처 | 원소장처와 동일 |
소장처1 | 忠淸南道 |
소장처2 | 扶餘郡 |
소장처3 | 恩山面 佳谷里 朴柄鎬 |
MF | 35-008155 |
자료유형 | 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
해제정보
해제작성자 | 정수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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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제작성일 | 2002-05-28 |
한글문서명 | 호적류15 |
한자문서명 | 戶籍類15 |
간행처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
해제작성언어 | 국한문 혼용 |
해제내용 |
호적류15
정수환
【정의】
1807년(純祖 7)에 박희갑이 大興郡으로부터 발급받은 準戶口
【내용】
[주제]
본 호적자료는 宗家와 직접적인 관련성을 갖고 있지 않다. 대체적으로 본 호적자료를 종가에서 소장하게 된 경위는 본 문서의 박경승의 아들 박흥신이 종가로 입후하게 되면서일 것으로 추정된다. 즉 박경승에서 박희갑으로 이어지는 가계와 아울러 박경승의 또 다른 아들인 박태갑이 종가로 계후하면서 두 집안의 문서가 섞이게 된 것이라 하겠다. 이와 관련된 호적자료는 ‘호적류 12’가 있어 상호 연결해서 이해 할 필요가 있다. 본 호적자료가 박경승에서 박희갑으로 이어지는 자료가 분명하다면 본 가계는 18세기 중엽까지 한성부에 거주하다 19세기 초엽경에 대흥군으로 거주지를 변경하였음을 알 수 있다. 특히 박희갑은 鰥夫로 등장하면서 아들과 며느리, 三寸姪과 함께 거주하고 있다. 노비에 대한 기록 중 ‘放賣’의 기록이 나타나고 있어 소유노비 중 일부는 매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노비의 상당수가 ‘逃亡奴婢秩’속에 기재된 것으로 보아 이 당시 만연한 노비도망의 실상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인다.
[용어]
‘周挾字改印’이란 호적 관련 문서 중 본문에서 지우고 고치거나 새로이 써 넣은 글자가 몇자 있다는 것을 표시하는 도장이다. ꡔ經國大典ꡕ「禮典」 戶口條에 보면 ‘周挾字改印’에 대한 규정이 나타나 있다.
[인물]
[지명]
【특징】
【비고】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08.16 해제작성,입력,교정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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