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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안2(立案2)

자료명 입안2(立案2) 저자 박경후(朴慶後)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MF번호 35-008155
유형분류 고문서/기타 주제분류 기타
수집분류 민간/기증·기탁·조사/고문서 자료제공처 디지털아카이브(SJ_ARC_BB)
서지 디지털아카이브 해제 디지털아카이브
원문텍스트 이미지

· 서지정보 서지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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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글문서명입안2
한자문서명立案2
이명(한글)
이명(한자)
수취(한글)한성부
수취(한자)漢城府
발급(한글)박경후
발급(한자)朴慶後
찬자(한글)미상
찬자(한자)미상
발급목적朴參判(朴慶後)이 衿川 北面 九老里 소재 전답을 매득한 사실을 인준함
간행년(서기력)肅宗24   1698 -
유형고문서
크기53x120cm
관인수
청구기호
소장처원소장처와 동일
소장처1忠淸南道
소장처2扶餘郡
소장처3恩山面 佳谷里 朴柄鎬
MF35-008155
자료유형전통명가소장고문서자료(전통시대지방사회경제사자료)

해제정보

해제작성자문숙자(해제)
해제작성일2002-05-28
간행처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해제작성언어국한문 혼용
해제내용
立案2
【정의】
1705년(숙종 31)에 守生이 武男으로부터 토지를 매득한 뒤 관련문서를 점련하여 관에 올리고 이를 입안받은 문서.
【내용】
[주제]
수생이 토지를 매득하고 이를 관으로부터 입안받기 위해 절차를 갖추어 문서를 올리고 인증을 받은 문서이다. 이런 경우 맨 앞에는 買主가 올리는 所志가 나오는 것이 일반적이나 그 문서는 남아있지 않고 財主의 招辭로 시작된다. 이어서 증인 2인과 필집 1인의 초사가 연결되어 있고, 토지매매를 인정하는 한성부 입안이 나오고 있다. 여기까지가 1705년의 토지매매에 대한 입안점련문기이다. 그러나 이 점련문기에는 이 외에 두 개의 문기가 더 첨부되어 있다. 하나는 康熙 37년에 元生員宅奴 者叱孫이 成生員宅奴 次先에게 토지를 방매하는 토지매매명문이며, 그 뒤에는 상전이 노비로 하여금 매매를 대행하게 할 때 발급해주는 牌子로 일종의 위임장이다. 이들은 구문기로서 딸려온 것으로 생각된다. 이번에 거래된 토지는 衿川 北面 九老里洞에 있는 밭으로 과거에는 字號가 資字였으나, 量田 이후 歸字田으로 바뀐 곳이다. 이들 문기를 검토한 후 한성부로부터 매매를 인정하는 입안이 발급되었다. 당시 금천현이 한성부에 소속되지 않았는데 한성부에서 입안을 발급한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다.
[용어]
입안이란 조선시대 官府에서 개인의 청원에 따라 매매․양도․決訟․立後 등의 사실을 官에서 확인하고, 이를 인증해 주기 위해 발급하는 문서이다. 예를 들면, 토지․가옥․노비나 그 밖의 재산의 매매․양도 등의 사유가 발생했을 때 취득자가 관에 입안을 신청하면 관에서는 財主와 증인․筆執, 또는 관계인의 진술을 받아 확인한 다음 입안을 만들어 주었다. 양전은 우리 나라 전근대사회에서 농지를 조사․측량하여 실제 작황을 파악하던 제도이다. 양전은 국가재정의 기본을 이루는 전세의 징수를 위하여 전국의 田結 수를 측량하고 누락된 토지를 적발하여 불법적으로 탈세를 행하는 토지가 없도록 한다는 점과 수확량에 따라 토지면적을 표시하는 우리 나라의 전통적인 結負制 하에서 전세의 합리적인 징수를 꾀하기 위해 실시되었다. 양전은 여말선초에 시행된 사례가 있고, 임란 직후인 1593~1594년에 처음으로 전국적인 규모로 양전이 이루어졌다. 이 후 1613년(광해군 5)의 삼남양전, 1634년(인조 12)의 삼남양전, 1663년(현종 4)의 경기도양전, 1665년의 함경도양전, 1669년의 충청도 20읍과 황해도 4읍에 대한 양전, 1701년(숙종 27)의 황해도 3읍 양전과 1709년의 강원도 16읍 양전, 1719년과 그 이듬 해의 삼남양전 등이 대표적인 양전이다.牌子는 牌旨 또는 背旨라고도 하는 오늘날의 위임장이다. 조선시대 양반들은 금전이 수반되는 거래를 신분을 격하시키는 것이라 판단하여 아랫사람에게 맡겨서 시행하도록 하였는데 그 때 권한을 위임하는 증명이 바로 이것이다.
[인물]
[지명]
금천은 현재 서울시에 편입된 금천 지역의 옛 지명이다. 1416년(태종 16) 금천현으로 하여 현감을 두었으나, 세조 때 과천군에 편입되었고 정조 때 시흥이라 개칭하였다. 금천현은 조선 초기 과천현의 일부를 병합하기 전의 독립된 현이었으므로 그 뒤의 시흥현과는 영역이 다소 다르다. 1895년(고종 32) 시흥군이 되어 인천부에 속하였다가 다음해 경기도의 한 군이 되었다.
【특징】
【비고】
[작성정보]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08.16
해제작성,입력,교정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제작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