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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황제구궐유지비(太祖高皇帝舊闕遺址碑)

자료명 태조고황제구궐유지비(太祖高皇帝舊闕遺址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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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북도 전주 (현재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1가 1-3)
· 작성시기 1905
· 비고 2-5227
190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173.0 X 67.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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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태조 이성계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할 때 머물렀던 곳의 기념비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태조고황제구궐유지비(太祖高皇帝舊闕遺址碑)
[내용 및 특징]
대한제국기인 1905년(광무 9)에 조선 제 1대 국왕 태조가 함흥에서 한양으로 환궁할 때 머물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전면과 음기 모두 고종황제의 어필이다. 이 비석은 현재 경기도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대궐터마을에 세워져 있다. 전면에는 대자해서(大字楷書)로 ‘태조고황제소어구궐유지(太祖高皇帝所御舊闕遺址)’라 새겨져 있다. 음기에는 ‘광무구년을사계추배수경서/명내부수석(光武九年乙巳季秋拜手敬書/命內部竪石)’이라 새겨져 있다.
비석이 세워진 곳은 풍양궁(豊壤宮)과 관련이 깊다. 풍양궁은 동이궁(東離宮)이라고도 하였는데, 조선 초기 태종 대에 시작하여 세종 대에 지금의 남양주 진접읍 내각리에 설치했던 이궁이다. 당시 도성을 중심으로 동쪽으로 풍양궁, 서쪽에 연희궁(衍喜宮), 남쪽에 낙천정(樂天亭, 일명 臺山離宮)의 삼궁이 있었는데, 이들 모두 조성계획은 태종 대에, 준공은 세종 초기에 이루어졌다.
이곳은 조선왕조를 창업한 태조 이성계가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왕자들 사이에 골육상쟁이 벌어지자 왕위를 정종에게 전하고 상왕이 되어 함흥으로 가버림으로써 ‘함흥차사’란 유명한 일화를 남기며 한양으로의 환궁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나중에 뜻을 굽혀 한양으로 돌아가던 중 머물렀던 곳이다.
처음 도성 주변에 이궁을 조성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궁궐에서 부엉이가 우는 변괴 때문이었다고 한다. ‘왕자의 난’으로 이복형제를 죽이고 왕위를 찬탈한 태종 이방원이 적장자인 양녕대군을 대신하여 3자인 충녕대군, 즉 세종에게 왕위를 물려준 1419년(세종 1), 궁궐에서 부엉이가 울자 옛 기록을 찾아보고 궁궐에서 부엉이가 우는 것은 흉한 징조라고 하여 피방(避方)할 장소를 물색하게 하였다고 한다. 당시 개경 근처에 기존에 사용하던 이궁이 있었으나 거리가 멀어 왕래하는 데에 불편이 있었다. 도성과 가까운 포천과 풍양에 본궁(本宮) 노자(奴子)만으로 10여 칸 규모의 집을 지었고, 낙천정을 거쳐 포천으로 내왕하면서 흉한 방위를 피하고자 하였다. 왕자의 난 등으로 인해 유사시 임금의 피신장소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즉 왕실에서 변란의 가능성을 대비한 이궁 설립이 목적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세종 대에 풍양궁은 주로 피방처나 상왕인 태종의 거처로 이용되었다고 하는데, 특히 한여름철의 휴식처로서 각광받아 태종이 단오절에 임박하여 석전희(石戰戱)를 보려고 하자 신하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풍양궁으로 돌아온 경우도 있었다.
조선 전기에 왕성하게 활용되던 풍양궁은 조선 후기에 어떤 이유로 불타버렸다. 다만 1696년(숙종 22)의 기록에 풍양궁터만이 남았다는 기록이 있다. 아마도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건물이 소실되어 터만 남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터만 남았던 이곳에 비석을 세운 시기는 1755년(영조 31)이다. 영조는 선대의 능을 알현하면서 풍양에 거처하였을 때, 성조(聖祖)의 옛 궁궐터에 아무런 표식이 없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구궐유지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당시 영조는 친필로 ‘태조대왕재상왕시구궐유지(太祖大王在上王時舊闕遺址)’라 쓰고 음기에는 ‘황명숭정기원후삼을해중춘주정우차배수경서(皇明崇禎紀元後三乙亥仲春晝停于此拜手敬書)’와 ‘지명풍양(地名豊壤)’이라 써서 비석을 세웠다. 현재도 대한제국기 고종이 세운 비와 함께 나란히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고종은 국가의 자주적 정통성을 천양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사업을 펼치는 가운데 국내 여러 곳에 금석문을 세웠다. 1899년(광무 3)에 태조 및 조선의 선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고서 그 이듬해 각 능의 표석을 어제어필로 써서 세우도록 하였는데, 《태조고황제건원릉추숭비》와 같은 금석문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고종은 1899년(광무 3) 삼척 활기동의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전주 노동산의 《준경묘비(濬慶墓碑)》, 삼척 동산의 《영경묘비(永慶墓碑)》, 전주 건지산의 《조경단비(肇慶壇碑)》를 세울 때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 건립된 전주 오목대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에도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다. 이러한 금석문의 탁본들은 모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태조고황제구궐유지비》 또한 대한제국기 국가의 정통성을 천양하려는 고종의 의도가 내포된 금석문이라 하겠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선조, 영조, 정조와 함께 명필로도 유명했던 고종의 서체를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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