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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황제탄강구리비(太祖高皇帝誕降舊里碑)

자료명 태조고황제탄강구리비(太祖高皇帝誕降舊里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윤용구(尹用求),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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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도 (현재주소: 함경남도 함주군 동천면 경흥리)
· 작성시기 1905
· 비고 2-5226
190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윤용구(尹用求)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172.9 X 67.6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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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태조 이성계가 탄생한 곳을 기리기 위해 세운 기념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태조고황제탄강구리비(太祖高皇帝誕降舊里碑)
[내용 및 특징]
대한제국기인 1905년(광무 9)에 조선 제 1대 국왕 태조가 탄생한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고종이 직접 음기의 내용을 지었다. 음기를 쓴 서자(書者)는 윤용구(尹用求)이다. 전면에는 대자해서(大字楷書)로 ‘태조고황제탄강구리(太祖高皇帝誕降舊里)’라 새겨져 있다. 『고종실록』 광무 9년 5월 10일 기사에 특진관 윤용구를 영흥군 흑석리에 있는 태조고황제탄강구리비의 비문과 임금이 직접 지은 음기의 서사관으로 임명한 일이 확인된다.
음기의 내용은 대체로 비석을 세우는 내력을 서술하고 그 본뜻을 밝히는 두 대목으로 구성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비석을 세우는 시기와 서자의 이름을 밝혔다. 비석을 세우는 내력을 밝힌 부분에서 알 수 있는 사실은 영조 때의 옛 비를 헐지 않고 고종 때의 신비를 그 곁에 세웠다는 점이다. 다음 부분에서는 1897년(광무 1) 고종 자신이 황제위에 등극한 사실과, 그 2년 뒤 태조를 고황제로 추존한 일을 밝혔다. 끝으로 태조가 조선을 창업한 공이 자손만대에 미치기를 기원하였다. 음기의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고종이 이 비를 세운 까닭은 태조가 왕에서 황제로 추존되었기 때문에 황제의 격식에 맞는 비석을 세워 태조에 대한 보본추원(報本追遠)의 뜻을 표하기 위함이었고, 한편으로는 자주독립국가임을 천양하려는 목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함경남도 영흥군 순녕면 대흑석리(영흥군은 현재 금야군으로 바뀌었음)에 소재한 환조(태조의 아버지 이자춘)의 구저(舊邸)에 세워졌다. 이 집에서 태조가 태어나 그 태를 묻었다가 1396년(태조 5) 다른 곳으로 옮기고 주변의 연목을 메운 뒤 준원전(濬源殿)을 세웠다. 1443년(세종 25) 정인지가 준원전에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하였으며, 그 뒤 준원전은 여러 차례 중수되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환조의 구저에 태조의 탄강을 기념하는 비석이 세워진 것은 두 차례로, 고종 때 세워진 ‘태조고황제탄강구리비’ 외에 영조 때에 세워진 비석이 있었다. 1754년(영조 30) 영조는 이듬해의 갑자(甲子)가 태조 탄생년과 일치하는 것을 미리 기념하여 영흥의 그해 전부(田賦)와 이듬해 신역(身役)을 감면하고, 이듬해 봄에 중신을 보내 도과(道科)를 설행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듬해 1월 4일 태조의 탄생지에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하는 영흥유학 조동빈(趙東彬)의 상소가 접수되었다. 이에 영조는 예조에서 주관하여 비를 세우도록 명하고, ‘태조대왕탄생구리(太祖大王誕生舊里)’라는 8자를 손수 써서 그것을 모사하여 새겨넣게 하였으며, 비의 음기를 직접 짓겠다는 하교를 내렸다. 또한 조동빈을 기내(畿內)의 참봉으로 조용(調用)하도록 명하였다. 같은 해 4월 18일에 비와 각이 완성되었다는 보고에 따라 역사를 감독한 영흥부사 이방수(李邦綏)에게 숙마(熟馬)를, 함경감사 김한철(金漢喆)에게 표피(豹皮)를 하사하고 음기를 베껴쓴 조명리(趙明履)를 가자하였다. 또한 영조는 이 비를 세우도록 명한 그 해 1월 28일 양주 풍양의 태조구궐유지(太祖舊闕遺址)에도 비석을 세우도록 명하였다.
이후 1787년(정조 11) 태종이 탄강한 해에 그 탄강구리인 항흥 귀주동에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고, 1824년(순조 24) 안병부 익위사 익실방 금구에 신의왕후의 탄강구지임을 기리는 비석을 세우도록 하였다. 순조 30년에는 영흥 궁궐리가 태조의 국양지지(鞠養之地)라 하여 비석을 세워 기념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사업들은 모두 영조가 영흥 흑석리에 세운 태조대왕탄생구리비의 예를 따른 것이었다.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고종은 국가의 자주적 정통성을 천양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899년(광무 3)에 태조 및 조선의 선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고서 그 이듬해 각 능의 표석을 어제어필로 써서 세우도록 하였는데, 《태조고황제건원릉추숭비》와 같은 금석문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고종은 1899년(광무 3) 삼척 활기동의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전주 노동산의 《준경묘비(濬慶墓碑)》, 삼척 동산의 《영경묘비(永慶墓碑)》, 전주 건지산의 《조경단비(肇慶壇碑)》를 세울 때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 건립된 전주 오목대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에도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다. .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태조 탄생지에 대한 영조 대 이후 비석 설립의 연원을 파악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고종문집(高宗文集)』 /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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