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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蹕遺址碑)

자료명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蹕遺址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김영목(金永穆),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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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전라도 전주 (현재주소: 전라북도 전주시 완산구 교동 산11)
· 작성시기 1900
· 비고 2-5225
190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성계(李成桂)
이희(李熙)
김영목(金永穆)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144.8 X 47.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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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태조 이성계가 승전하고 머물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유지비(遺址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蹕遺址碑)
[내용 및 특징]
대한제국기인 1900년(광무 4)에 조선 제 1대 국왕 태조가 승전(勝戰)하고 머물렀던 곳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전면은 고종이 직접 쓰고 음기의 내용도 지었다. 음기를 쓴 서자(書者)는 김영목(金永穆)이다. 전면에는 소전(小篆)으로 ‘어필/태조고황제주필유지(御筆/太祖高皇帝駐蹕遺址)’라 새겨져 있다. 음기에는 태조가 왜구를 무찌른 승전기가 새겨져 있다.
이 비석은 전주시 오목대에 세워져 있다. 이 언덕은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기 이전인 1380년(우왕 6) 9월에 삼도도순찰사(三道都巡察使)로서 남정(南征)하여 운봉(雲峰) 황산(荒山)에서 발호하던 왜구 아지발도(阿只拔道)의 무리를 정벌하고, 승전고를 울리며 개선하여 개경으로 돌아갈 때 전주에 당도하여 친지들을 한자리에 불러 야연(夜宴)을 베풀었다는 곳이다. 태조는 종친의 환영을 받고 크게 기뻐하여 노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 이때 종사관으로 이 자리를 지켜보던 정몽주(鄭夢周)는 고려를 무너뜨릴 이성계의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분연히 자리를 박차고 나섰다. 그는 홀로 말을 몰아 남천을 건너 고덕산성 만경대에 올라 멀리 북쪽 하늘을 우러르면서 비분강개한 마음으로 석벽제영(石壁題詠)이란 한 수의 시를 읊었다. 이때부터 오목대는 전주이씨의 새로운 시작의 상징으로 남았다. 한편 오목대의 맞은편 이목대에는 태조의 4대조인 목조(穆祖)의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 쓴 비석이 고종의 친필로 새겨져 있다.
김영목이 쓴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太祖高皇帝駐蹕遺址碑)》 음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목대는 전주 동쪽 1리 쯤 밖에 있는데 언덕이 좀 솟아있는 곳이다. 옛날에 태조고황제께서 남정하셨다가 크게 개선하시던 날에 이 대에서 여러 일가친척을 부르고 오목대라 이름 붙이신 이후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다. 무릇 이 대에 오르면 성내의 광경이 모두 보여서 이곳이야말로 전주의 눈동자인가 한다. 대의 동쪽에 발산이란 산이 있고, 산 아래 자만동이란 곳이 있는데, 『읍지』에서는 목조대왕의 집이 이 근처였다고 한다. 또한 이 고을 주민들도 장군수(將軍樹), 또는 호운석(虎隕石)으로 일러서 옛 자취를 전하고 있다. 전주는 우리 왕실의 본향이다.”
이후 경기전의 관원으로 하여금 이 비석을 수호하게 하고 농작물을 경작하거나 동물을 방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비를 세운다는 내용을 기재하였다.
대한제국의 수립 이후 고종은 국가의 자주적 정통성을 천양하려는 목적으로 여러 사업을 펼쳤다. 1899년(광무 3)에 태조 및 조선의 선왕들을 황제로 추존하고서 그 이듬해 각 능의 표석을 어제어필로 써서 세우도록 하였는데, 《태조고황제건원릉추숭비》와 같은 금석문이 대표적이다. 이 밖에도 고종은 1899년(광무 3) 삼척 활기동의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전주 노동산의 《준경묘비(濬慶墓碑)》, 삼척 동산의 《영경묘비(永慶墓碑)》, 전주 건지산의 《조경단비(肇慶壇碑)》를 세울 때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으며, 그 이듬해 건립된 전주 오목대의 《태조고황제주필유지비》에도 직접 전면을 쓰고 음기를 지었다.
한편 조선왕조에서 주필비를 세운 전통은 영조 때에도 확인된다.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였다가 평안남도 영유(永柔)를 거쳐 강서(江西)로 돌아오는 길에 비바람을 만나 평양부(平壤府)에 있던 최륜(崔崙)의 집에 머물렀던 일이 있었다. 영조는 이를 추념하기 위해 직접 글을 짓고 써서 비석을 세웠다. 비문에는 ‘계사년주필처(癸巳年駐蹕處)’라는 대자와 함께 ‘갑오맹하경서(甲午孟夏敬書)’라는 소자의 관지(款識)가 적혀 있다. 이는 일제강점기에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에 ‘조선선조주필사적비(朝鮮宣祖駐蹕事蹟碑)’라는 제목 아래 실려 있는 비문의 내용과 일치한다. 그런데 금석총람에는 위의 내용 외에도 비문의 음기에 해당하는 후면의 내용 또한 실려 있다. 음기 역시 영조의 어제로, 이 비문을 쓰게 된 계기와 간기가 적혀있다.
“내 나이 81세 되는 해(1774년) 여름 4월 12일에 평양(平壤) 유학(幼學) 최배호(崔配浩)가 올린 글을 통하여 [선조대왕께서] 계사년(1593년) 용만(龍灣: 의주의 옛지명)에서 돌아오실 적에 비를 피하기 위해 최륜의 집에 묵으셨다는 것을 듣게 되었다. 지금 글을 올린 이는 바로 그의 6대손이다. 만일 전면의 어필만 있다면 후세에 어찌 이 일을 알겠는가. 따라서 충자(冲子)에게 명하여 후면에 이와 같이 쓰게 한다.”
《선조대왕주필사적비》 또한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 선포 이후 황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엿볼 수 있고, 《선조대왕주필사적비》와 함께 주필비의 연원과 맥락을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고종문집(高宗文集)』/ 국학진흥연구사업추진위원회 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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