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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선황제건릉추숭비(正祖宣皇帝健陵追崇碑)

자료명 정조선황제건릉추숭비(正祖宣皇帝健陵追崇碑) 저자 이성(李祘),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93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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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화성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87-1)
· 작성시기 1900
· 비고 2-5293
190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성(李祘)
김씨(金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60.0 X 93.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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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정조(正祖)를 황제(皇帝)로 추존하고 세운 능표석(陵表石)
원자료제목
· 표제정조선황제건릉추숭비(正祖宣皇帝健陵追崇碑)
[내용 및 특징]
1900년(광무 4) 정조를 선황제(宣皇帝)로, 효의왕후(孝懿王后)를 선황후(宣皇后)로 각각 추존하고 세운 표석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고종황제가 직접 짓고 썼다. 원표석은 경기도 화성군 안룡면 화산에 있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를 따로 장황하였다. 전면에는 ‘대한/정조선황제건릉/효의선황후부좌(大韓/正祖宣皇帝健陵/孝懿宣皇后祔左)’가 새겨져 있는데 대한제국기 금석문에 보이는 전형적인 소전(小篆) 스타일이다.
1897년 고종은 황제국을 선언하면서 대한으로 국호를 개정하였고, 광무의 연호를 채택하였다. 황제로 즉위한 고종은 자신의 지위변화에 따라 선대에 대한 여러 추숭사업을 시행하였다. 삼척에 있는 태조 이성계의 고조인 목조(穆祖)의 부모 무덤은 그 실체가 조선 일대를 걸쳐 논란이 되었는데, 1899년 고종은 이를 준경(濬慶)․영경묘(永慶墓)로 공인하였다. 이어 장조(莊祖), 정조(正祖), 순조(純祖), 익조(翼祖)를 자신의 직계 4조로 인정하여 태조 이성계와 함께 황제로 추숭하였다. 이듬해인 1900년에는 추숭사업이 진행된 선대 임금 및 왕비의 비석 개수사업에 착수하였다. 《정조선황제건릉추숭비(正祖宣皇帝健陵追崇碑)》 또한 이러한 일련의 추숭사업의 일환이었다. 이 과정에서 1900년 3월 태조 이성계의 근거지였던 영흥과 함흥의 두 본국에 대한 정비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었다. 고종은 두 지역에 존재하는 태조의 4대조 및 그 부인이 안장된 8능을 살피고 적절히 개수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따라서 당시 고종의 직계 4대조는 물론 태조의 4대조와 그 비들의 능들도 개수되었고, 표석도 다시 세워졌다. 현재 장서각에는 이러한 금석문 탁본들이 모두 소장되어 있다.
피전자 정조의 이름은 산(祘), 자는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함으로써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는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황제로 추존하면서 건릉에 세운 표석인 ‘정조선황제건릉비(正祖宣皇帝健陵碑)’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봉분을 빙 둘러 12칸의 난간석이 에워싸고 있으며, 난간석의 기둥에는 12지 방위가 문자로 새겨졌다.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 1좌가 있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봉분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1좌가 있으며, 그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은 사실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1992년 복원한 비각이 있으며, 정자각 남쪽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좌우 양측에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2002년 정자각 서쪽에 수라간을 복원하였으며, 능역 남측 대로변에 재실이 있다.
[자료적 가치]
정조와 효의왕후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20세기 초반 황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대한제국기 황실의 정당성 확보를 위한 고종의 여러 추숭사업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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