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장조의황제융릉추숭비(莊祖懿皇帝隆陵追崇碑)

자료명 장조의황제융릉추숭비(莊祖懿皇帝隆陵追崇碑) 저자 이선(李愃), 홍씨(洪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화성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작성시기 1900
· 비고 2-5288
190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선(李愃)
홍씨(洪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57.8 X 92.6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사도세자를 황제로 추숭하고 세운 추숭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장조의황제융릉추숭비(莊祖懿皇帝隆陵追崇碑)
[내용 및 특징]
1900년(광무 4)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를 황제로 추숭하고 세운 추숭비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전면은 ‘대한/장조의황제융릉/헌경의황후부좌(大韓/莊祖懿皇帝隆陵/獻敬懿皇后祔左)’를 소전으로 새겼다. 음기에는 장조의 출생, 추존사실, 이장, 추존 등에 대한 내용을 간략하게 기술하였다. 마지막 부분에 ‘용신소자지미침(庸伸小子之微忱)’이라 쓴 점을 미루어 고종의 어제임이 확인된다.
이 표석의 피전자인 사도세자의 시호는 사도(思悼)ㆍ장헌(莊獻)으로 시호인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映嬪李氏)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를 비로 맞이해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정(李琔),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이산(李祘), 청연군주(淸衍君主), 청선군주(淸璿君主)를 낳았으며, 궁인 출신의 양제임씨(良娣林氏)와 수칙박씨(守則朴氏)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청근현주(淸瑾縣主)를 낳았다.
피전자인 혜경궁 홍씨는 본관이 안동(安東) 풍산현(豊山縣)으로 시조가 홍지경(洪之慶)이다. 고조는 홍만용(洪萬容), 증조는 홍중기(洪重基), 조부는 홍현보(洪鉉輔), 부친은 홍봉한(洪鳳漢)이다. 혜경궁은 1735년(영조 11) 6월 18일 반송방(盤松坊) 외갓집에서 태어났는데, 출생 전날 홍봉한의 꿈에 금비늘이 빛나는 흑룡이 침실에 서려 있었다고 한다. 9살에 사도세자의 빈으로 선발되었으며 1750년(영조 26) 겨울 첫째 아들인 의소세손(懿昭世孫)을 출산하였다. 그러나 세손은 얼마지 않아 세상을 떠났다. 1752년(영조 28) 9월에 둘째 아들 정조를 출산하였다. 혜경궁은 영조, 정조, 순조 등 3대에 걸쳐 81세의 장수를 누렸으므로 수차례 존호를 받았다. 예컨대 1778년(정조 2) 효강(孝康), 1783년(정조 7) 자희(慈禧), 1784년(정조 8) 정선(貞宣), 1795년(정조 19) 휘목(徽穆) 등의 존호를 받았다. 혜경궁은 사도세자와의 사이에서 의소세손과 정조 이외에 딸 둘을 더 두었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맏아들인 경의군(敬義君) 이행(李緈)을 세자로 삼았으나 그는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735년 음력 1월 21일에 후궁인 영빈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낳았다.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가 되어 원자(元子)의 칭호와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영조실록』과 『한중록(閑中錄)』 등에는 그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추숭과 개호에 따른 능의 변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사제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자 영조는 양주(楊州)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峯山,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이후 정조 즉위년(1776)에 수은묘를 원(園)으로 승격시켜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후 정조 13년(1789)에 현재의 위치로 천봉하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이후 선조 16년(1816) 혜경궁이 승하하자 동원(同原)에 합봉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본 자료가 당시 융릉의 격상사실이 반영된 금석문이다. 융릉은 현재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으며,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도세자․혜경궁 홍씨와 관련한 탁본은 장서각에 『장조의황제융릉추숭비(莊祖懿皇帝隆陵追崇碑)』 외에도 『현륭원비(顯隆園碑)』,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 등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기 황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도세자 사후 각종 추숭으로 인한 호칭의 변화와 능제의 변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 『정조실록(正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莊祖]永祐園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624~13626) / / 『[莊祖]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27~13630) / / 『[莊祖]顯隆園遷園儀軌』(규장각 13629) / /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3) / / 『顯隆園誌文』(장서각 2-4010)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Ⅴ-朝鮮王室(帖裝本)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7.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Ⅱ-帖裝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