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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자료명 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저자 이안사(李安社), 이희(李熙), 조병필(趙秉弼),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14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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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삼척 (현재주소: 강원도 삼척시 미로면 활기리)
· 작성시기 1899
· 비고 2-5214
189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안사(李安社)
이희(李熙)
조병필(趙秉弼)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153.0 X 51.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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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대한제국기에 목조(穆祖)의 유지(遺址)를 기리기 위해 세운 비석.
원자료제목
· 표제목조대왕구거유지비(穆祖大王舊居遺址碑)
[내용 및 특징]
대한제국기인 1900(광무 4)년 목조의 유지(遺址)에 비석을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장황하였다. 목조는 태조의 고조부이다. 전면은 ‘어필/목조대왕구거유지(御筆/穆祖大王舊居遺址)’라고 소전으로 새겼다. 음기의 서자는 조병필(趙秉弼)이고, 전서자와 찬자는 모두 고종(高宗)이다.
『전주읍지(全州邑誌)』에 의하면 전주의 동쪽에 자리하고 있는 발산(鉢山) 또는 발리산(發李山)의 남쪽 아래에 자만동(滋滿洞: 현 校洞)이 있었는데 이곳에 목조대왕의 집이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 오목대(梧木臺)의 동쪽 발리산 아래에도 유지비가 세워져 있는데, 1900년에 ‘목조대왕구거유지(穆祖大王舊居遺址)’라고 새겨 세웠으며 현재 전라북도 기념물 제16호이다.
고종은 이 비석을 건립하면서 어제를 지어 “그 고을의 전설과 전 정승 허목이 삼척부사로 봉직할 때 지은 『주지(州誌)』 서문과 노동(蘆洞), 동산(東山) 두 산소에 대한 기록이며, 일찍이 정철이 강원감사 재임 때에 산소의 지도를 그려 올려 수축하기를 청한 후 사적의 시말과 여러 선조께서 도백에게 명령하여 해마다 보살피게 하여 벌목의 금지와 산소의 수호에 대한 절차가 노동에 모신 산소와 똑같아 두 산소의 실적을 일일이 징험할 수 있다.”고 하여 목조의 유지와 산소에 대해 조사한 내용을 기술하기도 하였다.
목조는 전주이씨 17세 양무(陽茂)의 아들로 이름은 안사(安社)이다. 고려에 벼슬하여 의주지사(宜州知事)를 지내고 원(元)나라로 들어가 벼슬하여 남경(南京) 오천호(五千戶)의 다루카치(達魯花赤: 원나라 지방관청의 장관직)가 되었다가 1274년(원종 15) 3월 10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목왕(穆王)으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이 인문성목(仁文聖穆)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덕릉(德陵)으로 함흥(咸興) 서북쪽 가평사(加平社: 현 함경남도 신흥군 가평면 능리)의 계좌(癸坐)에 있다. 처음에는 함북 경흥(慶興: 孔州)의 성남(城南)에 있었는데 1410년(태종 10)에 현재 덕릉으로 이장하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배위는 효공왕후(孝恭王后) 이씨(李氏)이다. 본관은 평창(平昌)이요, 천우위장사(千牛衛長史) 공숙(公肅)의 딸이며 5월 15일에 승하하였다. 1394년(태조 3) 11월 6일에 효비(孝妃)로 추존되고 그 뒤 태종대왕이 효공(孝恭)이라고 존호를 더 올렸다. 능은 안릉(安陵)으로 목조대왕과 같은 언덕인데 처음에는 경흥 성남 땅에 있다가 1410년(태종 10)에 현재 위치로 이장하고 표석을 세웠다.
전주이씨는 대대손손 전주의 자만동에서 살다가 17세손 양무장군과 18세손 목조대왕의 세대에 이르러 일족은 전주를 퇴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때는 1230년(고려 고종 17)으로 27세 무렵의 일이었다. 전주의 주관과 안렴사가 병력으로 전주이씨 일족을 굴복시키려 하자 살생의 화를 피하고자 목조대왕은 부친인 양무장군을 모시고 탈출하여, 전주의 동북쪽으로 회덕(懷德)ㆍ괴산(傀山)ㆍ제천(提川)ㆍ정선(旌善) 등의 직선코스를 따라 달려갔다. 함께 따르는 일족과 외족이 170여 호나 되었다. 같은 해 목조대왕은 선고상(先考喪)을 당하였다. 양무장군의 묘는 삼척군 미로면 활기리 신좌(辛坐)에 있다.
장서각에는 《목조대왕덕릉비(穆祖大王德陵碑)》, 《준경묘비(濬慶墓碑)》, 《영경묘비(永慶墓碑)》 등이 소장되어 있어 대한제국기 목조와 그 선대의 유지와 묘소 등의 정비와 금석문의 수립사실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가 일괄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기 왕실추숭사업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고, 고종황제의 어필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高宗實錄)』 /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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