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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영빈수경원비(昭裕暎嬪綏慶園碑)

자료명 소유영빈수경원비(昭裕暎嬪綏慶園碑) 저자 이씨(李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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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 30-1)
· 작성시기 1899
· 비고 2-5279
1899(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씨(李氏)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跡碑)
· 크기(cm) 198.7 X 78.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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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영빈이씨(暎嬪李氏)의 능표석(陵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소유영빈수경원비(昭裕暎嬪綏慶園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英祖)의 후궁이며 장헌세자(莊獻世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안장된 수경원(綏慶園)의 능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청색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전면은 소전(小篆)으로 새겼고 음기는 단정한 해서로 새겼다. 모두 고종의 어제어필이다. 1899년(광무 3) 영빈이씨의 무덤을 수경원으로 격상하며 서울시 서대문구 신촌동에 건립한 것이다.
전면에는 전서로 ‘大韓/昭裕暎嬪綏慶園(대한/소유영빈수경원)’이라 새겼으며, 음기에는 광무 3년 11월 시호를 ‘소유(昭裕)’라 하고 수경원으로 봉호(封號)했다는 간략한 내용을 해서로 새겼다.
영빈이씨는 영조의 가장 깊은 총애를 받았던 후궁으로 사도세자의 생모이다. 영조가 즉위한 후 귀인으로 봉해졌다가 영조 6년(1730) 영빈으로 승격하였다. 1735년 이씨는 정빈이씨 소생의 효장세자가 죽은 지 7년 만에 원자를 출산하여 후사를 기다리던 영조를 기쁘게 하였다. 이씨 소생으로는 사도세자 이외에도 화평, 화협, 화완옹주가 있었는데 특히 영조는 화평옹주와 화완옹주를 총애하여 수시로 그들의 집을 방문하고 궁중에 머물도록 하였다. 반면 영조는 사도세자와 화협옹주를 극도로 미워하였다.
영빈 또한 영조의 사랑을 받아 온갖 호사를 누렸다. 사도세자와 영조의 사이가 벌어지자 자신에게 발길이 뜸해진 영조의 마음을 되돌리려 애쓰던 중에 영조 38년(1762) 나경언이 고변(告變)하여 사도세자가 반역을 꾀하였다고 하며 세자의 비행을 일러바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영조가 격노하여 세자가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세자의 생모인 이씨까지 궁 안에 돌던 유언비어를 영조에게 옮기며 세자를 처분할 것을 간하였다. 결국은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굶겨 죽이는 임오화변이 일어나게 되는데, 아들의 죽음에 생모 이씨의 고변이 중요한 역할을 한 것이었다.
이씨는 임오화변 이후에도 2년을 더 살다가 영조40년 (1764) 7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영조는 이씨를 후궁 제일의 예로 장례하게 하고 이듬해 의열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1899년(광무 3) 9월에 고종은 의정부의 논의를 거쳐 영빈의 시호를 소유라 정하니, 덕에 밝고 공로가 있는 것을 ‘소(昭)’라 하고, 배우기에 힘쓰고 묻기를 좋아하는 것을 ‘유(裕)’라 한다는 시법을 따른 것이다. 이와 함께 원의 칭호를 ‘수경(綏慶)’으로 정하였다. 10월에는 상시봉원도감(上諡封園都監)을 설치하였다. 영빈의 시호죽책문제술관으로 김학진(金鶴鎭), 서사관으로 이호익(李鎬翼), 은인(銀印)의 전문사사관으로 심상훈(沈相薰), 음기제술관으로 민영환(閔泳煥), 서사관으로 박기양(朴箕陽), 전면대자서사관으로 이근명(李根命)을 명하였다.
음기제술관 민영환(1861~1905)은 본관이 여흥(驪興), 자는 문약(文若), 호는 계정(桂庭)이다. 1878년(고종 15) 문과에 급제한 뒤 여러 요직을 거쳐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자결하였다. 시호는 충정(忠正)이다.
서사관인 박기양(1856~1932)은 본관이 반남(潘南)으로, 자는 범오(範五)이며, 호는 석운(石雲), 쌍오거사(雙梧居士)이다. 1888년(고종 25)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대사성을 지내기도 하였다. 시국이 어려워지자 연명상소를 올렸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낙향하였다. 특히 행서에 뛰어났다.
전서를 쓴 이근명(1840)은 본관이 전의(全義)로, 자는 순구(舜九)이다. 1871년(고종 8) 문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대사성, 좌승지 등을 지냈다. 일제에 병탄된 뒤에는 친일로 돌아서 자작의 칭호를 받았다.
[자료적 가치]
대한제국기 왕실추숭사업의 일면을 이해할 수 있고, 고종의 어필을 금석문을 통해 감상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 / 『고종실록(高宗實錄)』 / / 『藏書閣所藏儀軌解題』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正祖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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