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영조대왕원릉개상비(英祖大王元陵改上碑)

자료명 영조대왕원릉개상비(英祖大王元陵改上碑) 저자 이금(李昑),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5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 8-2)
· 작성시기 1890
· 비고 2-5275
189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이금(李昑)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09.8 X 72.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철종(哲宗)의 예릉(睿陵) 앞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영조대왕원릉개상비(英祖大王元陵改上碑)
[내용 및 특징]
1890년(고종 27) 영종(英宗)의 묘호(廟號)를 영조(英祖)로 고치고, 시호(諡號)를 정문선무희경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라 개상(改上)하면서 다시 세운 묘표석의 탁본이다. 전면과 음기로 나누어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전면은 “조선국/영조대왕원릉(朝鮮國/英祖大王元陵)”이라 소전(小篆)으로 쓰고, 음기에는 영종의 묘호를 영조로 개상하고 시호의 개상, 존호의 추상사실을 기록하였다.
영조의 묘호 개상에 대한 논의는 1889년(고종 26) 봉조하 김상현의 상소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고종에게 올리는 상소에서 “신이 듣건대, 종묘(宗廟)의 예에 공이 있는 임금을 ‘조(祖)’라 하고 덕이 있는 임금을 ‘종(宗)’이라 한 것은 칭호를 매우 중시한 것입니다. 이것은 바로 모든 임금들이 전해 온 큰 전례(典禮)이며 또한 만대에 변치 않을 큰 의리이고 공론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더욱 전례를 중시하는데, 삼가 생각건대, 우리 태조(太祖), 세조(世祖), 선조(宣祖), 인조(仁祖), 순조(純祖)의 다섯 성조(聖祖)의 묘호(廟號)의 높음이 그 사이에 가장 성대합니다. ‘조’라 하건 ‘종’이라 하건 높이 받드는 것은 마찬가지이지만, 공이 있으면 반드시 ‘조’라고 칭하는 것은 보통과 다른 것을 구별하기 위해서입니다.”라고 하고 영종 또한 여러 공이 훌륭하니 ‘조’로 바꿀 것을 계청하였다.
이에 고종은 “우리 영묘(英廟)는 지극한 어짊과 큰 덕과 크고 성대한 공적이 있어서 아! 잊지 못하는 생각이 오래될수록 더욱 간절하다. 이번에 경의 상소를 보니, 실로 온 나라의 다 같은 바람에서 나온 것이지만, 전례가 막중하니 수의(收議)하게 하라.”는 비답을 내렸다. 이에 여러 대신들이 모인 빈청에서 논의가 진행되었는데, 대체로 영종의 묘호를 개상하는 쪽으로 중의가 모아졌다. 이에 고종은 묘호와 의절은 도감을 설치하여 거행토록 명하였다. 이때 정성왕후(貞聖王后)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상존호 도감도 합설하도록 하였다.
이후 빈청(賓廳)에서는 영종대왕(英宗大王)의 묘호망단자(廟號望單子)를 영조(英祖)로, 시호 망단자(諡號望單子)를 정문선무희경현효(正文宣武熙敬顯孝)로, 존호망단자(尊號望單子)를 중화융도숙장창훈(中和隆道肅莊彰勳)으로,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존호망단자를 원렬(元烈)로,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존호 망단자를 정현(正顯)으로 의계(議啓)하였다. 1890년(고종 27) 1월 3일 고종은 종묘(宗廟)와 영녕전(永寧殿)에 나아가 전알(展謁)하였다. 춘알(春謁)을 한 것이다. 이어 영조대왕(英祖大王), 정성왕후(貞聖王后), 정순왕후(貞純王后)에게 추상(追上)한 존호(尊號)의 옥책(玉冊)과 금보(金寶)를 직접 올리고, 이어 신주(神主)를 고쳐 쓰는 의식을 거행하였다.
1890년 영조의 원릉비를 다시 세울 것을 결정하고 묘호도감에서는 표석의 음기제술관으로 한장석(韓章錫)을, 서사관으로 이순익(李淳翼)을, 전문서사관으로 김성근(金聲根)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고종은 “원릉 표석의 전면과 음기에 새길 글을 내가 직접 쓰겠으니 묘호도감에 분부하라.”는 전지를 내렸다. 이를 통해 원릉개상비의 찬자와 서자는 고종임을 알 수 있다.
장서각에는 영조의 묘호 개상 이전의 원표석 또한 소장되어 있다. 1776년(정조 즉위) 원릉비(元陵碑)를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장황한 금석문이다. 원 비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의 원릉에 세운 것이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로 나누어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전면은 전서로 ‘조선국영종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새겼고, 음기에는 영조의 탄생, 책봉, 승하 등의 간략한 이력을 해서로 써서 새겼다. 음기의 찬자는 정조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7종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모두 동일시기에 탁본하였으나 표구는 시기를 달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조선 제 19대 임금인 숙종과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 사이에서 태어났다. 비(妃)는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耈)의 따님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이름은 금(昑)이며, 자는 광숙(光叔)이다.
영조는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후사가 없고 건강이 좋지 못하자 노론의 이정소는 임금에게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영중추부사 이이명이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노론은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의 3대를 이은 혈종[三宗血脈)은 임금인 경종을 제외하고 왕제(王弟)인 연잉군 밖에 없는데 경종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음을 들어 왕세제의 책봉을 주장한 것이다.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즉위한 영조는 바로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며 탕평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왕세제로 책봉된 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영조는 신임옥사를 통해 실세로 등장한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을 숙청하였다. 또한 영조 1년에는 을사처분을 통해 노론을 다시 중용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 내 강경세력인 준론자들이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 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곧이어 1729년에는 을유처분으로 노론, 소론의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하여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탕평책은 요직의 인선에 반영되어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맡기면 전랑에 소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쌍거호대의 방식은 정국이 안정되자 능력에 따라 중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는 극심한 붕당정치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로 왕권강화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정국이 본 궤도에 오르자 이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그 기반을 강화시켜 나아갔다. 이러한 정국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확대시켜 나아갔던 것이다.
영조는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참극을 경험하였다.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인 남인과 소론은 정치적 실세인 노론에 맞서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노론은 김한구, 홍계희 등이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하게 함으로써 뒤주 속에 가두에 죽이는 참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자료적 가치]
영조의 묘호와 시호의 개상 사실을 원릉개상비를 통해 확인할 수 있고, 고종의 어제어필을 왕실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 『고종실록(高宗實錄)』/ /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