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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죽교비(善竹橋碑)

자료명 선죽교비(善竹橋碑) 저자 정몽주(鄭夢周),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5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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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개성 선죽교 (현재주소: 개성직할시 선죽동)
· 작성시기 1872
· 비고 25350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정몽주(鄭夢周)
이희(李熙)
이희(李熙)
이희(李熙)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55.8 X 101.2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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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고종(高宗)이 선죽교에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선죽교비(善竹橋碑)
[내용 및 특징]
1872년(고종 9) 고종이 개성(開城)을 방문하여 문묘(文廟)에 참배하고, 목청전(穆淸殿)과 선죽교를 둘러본 후 영조(英祖)의 시를 차운하여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의 충절과 성리학전을 칭찬하는 시 1구를 짓고 그 내력을 함께 새겨 건립한 비의 탁본이다. 선죽교는 길이 10m가 안되는 작은 규모의 돌다리이다. 고려 태조가 919년 송도(개성)를 건설할 때 이 다리를 축조하였다. 원래의 이름은 선지교였는데, 선죽교로 바뀌었다. 고려시대에는 돌난간이 없었는데 조선 정조 때 정몽주의 후손들이 난간을 설치하였다.
선죽교에는 이 외에 영조 때 세워진 비석도 함께 있다. 1740년(영조 16년)에 세워진 비석으로, 그해 가을 영조가 목청전을 지나는 길에 선죽교를 보고서 정몽주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다리에 멈추어서 시를 짓고 글씨를 써서 겨울에 세웠다고 한다. 영조 때의 비문에 의하면 한때 우연히 감격하여 시를 지은 것이 아니라 옛 도(道)를 높이고 충(忠)을 숭상하던 성대한 뜻을 체득하기 위해서 세운 것이라고 한다. 현재 탁본은 전해지지 않는다.
장서각 소장 고종대 탁본은 원탁이며 전면에 ‘당저어제어필(當宁御製御筆)’이라는 전서와 ‘危忠大節光宇宙 吾道東方賴有公’이라는 해서로 쓰였으며, 후면은 역시 정갈한 해서로 쓰였다. 고종이 선죽교를 둘러보고 감회를 기록한 글로 모두 고종의 친필이다.
정몽주의 본관은 영일(迎日), 출생지는 영천(永川), 초명은 정몽란(鄭夢蘭) 또는 정몽룡(鄭夢龍),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으로 아버지는 정운관(鄭云瓘)이다. 어머니 이씨(李氏)가 난초화분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땅에 떨어뜨리는 꿈을 꾸고 낳았기 때문에 초명을 정몽란이라 했다. 뒤에 정몽룡으로 개명하였고 성인이 되자 다시 정몽주라 고쳤다.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해 게을리 하지 않았고 성리학에 대한 조예가 깊었다. 당시 고려의 『주자집주(朱子集註)』에 대한 정몽주의 강설이 사람의 의표를 찌를 정도로 뛰어나 모두들 놀라워했다. 그러다가 송나라 유학자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전해지면서 그 내용이 정몽주의 강설내용과 서로 맞아떨어지는 것을 보고 모두 탄복하였다고 한다. 정몽주의 시문은 호방하고 준결하며 시조 「단심가(丹心歌)」는 정몽주의 충절을 대변하는 작품으로 후세에까지 많이 회자되고 있다.
1391년 인물추변도감제조관(人物推辨都監提調官)이 되고, 안사공신(安社功臣)의 호를 더했으며, 이듬해 『대명률(大明律)』·『지정조격(至正條格)』 및 본국의 법령을 참작·수정해 신율(新律)을 만들어 법질서를 확립하려고 힘썼다. 당시 이성계의 위망(威望)이 날로 높아지자 조준(趙浚)·남은(南誾)·정도전(鄭道傳) 등이 이성계를 추대하려는 책모가 있음을 알고 이들을 제거하려 하였다. 그런 와중에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 왕석(王奭)을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황주에서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어져 벽란도(碧瀾渡)에 드러눕게 되자, 그 기회에 이성계의 우익(羽翼)인 조준 등을 제거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 챈 이방원(李芳遠)이 아버지 이성계에게 위급함을 고해 그날 밤으로 개성으로 돌아오게 하는 한편, 역으로 정몽주를 제거할 계획을 꾸몄다. 정몽주도 이를 알고 정세를 엿보려 이성계를 문병하였으나 귀가하던 도중 선죽교에서 이방원의 문객 조영규(趙英珪) 등에게 살해되었다.
참고로 『고종실록』에 영조의 친필비를 고종이 보았으며 고종 11년 영조의 친필비각을 완성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울러 선죽교비 탁본은 장서각에 고종대 본 1점이 있으며, 규장각에 4종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충신 정몽주에 대한 조선왕실에서의 추모와 금석문의 전래과정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고종실록』 『한국금석문대계』2 / 조동원 /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1.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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