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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정왕후태릉비(文定王后泰陵碑)

자료명 문정왕후태릉비(文定王后泰陵碑) 저자 윤씨(尹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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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노원구 공릉동 223-19)
· 작성시기 1853
· 비고 2-5237
185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윤씨(尹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25.2 X 82.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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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중종(中宗)의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의 능비(陵碑) 탁본(拓本).
원자료제목
· 표제문정왕후태릉비(文定王后泰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1대 국왕 중종(中宗)의 두 번째 계비(繼妃)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태릉(泰陵)에 세운 능표석(陵表石)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장서각에 소장된 문정왕후태릉비 탁본은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족자 형태로 소장되어 있는데, 두 점 모두 탁면에 오금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심청색(深靑色) 비단으로 만들었다. 천리에 미색 비단으로 만든 풍대(風帶)가 두 줄 있다. 축두(軸頭)는 나무로 제작하였고 전체적 보존상태는 양호한 편이다.
전면에는 소전체(小篆體)로 ‘조선국 문정왕후태릉(朝鮮國 文定王后泰陵)’이라 새겼다.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문정왕후의 탄생, 왕비책봉(王妃冊封)과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지, 향년 등을 기재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한편, 문정왕후태릉비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문정왕후(1501~1565)는 파평윤씨로 파산부원군(坡山府院君) 윤임(尹任)의 딸이다. 1517년(중종 12) 왕비로 책봉되었고, 중종과의 사이에서 명종(明宗), 의혜공주(懿惠公主), 효순공주(孝順公主), 경현공주(敬顯公主), 인순공주(仁順公主) 등 1남 4녀를 두었다. 문정왕후는 어려서부터 총명함이 뛰어났고 검소하였다고 전한다.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가 1515년(중종 10)에 승하하자 뒤를 이어 왕비에 올랐고, 문정왕후가 경원대군(慶源大君, 明宗)을 낳자 세자(仁宗)의 외숙인 윤임과 문정왕후의 오빠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소윤(小尹)이라 하여 외척간의 정쟁이 시작되기도 하였다.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승하하자(1545) 인종의 뒤를 이어 명종이 12세의 어린 나이에 즉위하게 되고, 이로써 문정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었다. 8년에 걸친 수렴청정 기간 중 윤원형을 필두로 한 외척들이 정권을 장악하여 을사사화(乙巳士禍)와 양재역벽서사건(良才驛壁書事件) 등 정치적 음모를 꾸미기도 하였다. 한편 불교신앙에도 깊은 관심을 가진 문정왕후는 승과(僧科)를 설치케 하여 승려들의 도첩제(度牒制)를 부활시키는 등 불교의 진흥에도 전력을 기울였다. 문정왕후는 1565년(명종 20)에 향년 65세로 창덕궁 소덕당에서 승하하였다. 이 해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성렬인명(聖烈仁明)’이라는 존호는 문정왕후의 생시인 1547년(명종 2) 가상하였다. 태릉과 관련된 기사와 그 전향규례(典享規例)에 대한 정보는 이왕직에서 편찬한 『태릉지(泰陵誌)』를 참조할 수 있다.
태릉은 현재 서울시 노원구 공릉2동에 있다. 태릉의 배치를 보면, 봉분에 운채(雲彩)와 십이지신상을 조각한 병풍석을 두르고, 봉토를 받쳐주는 만석(滿石) 중간에 방위를 나타내는 십이지를 문자로 조각하여 십이지신상과 병행하였다. 모든 석물은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태릉은 문정왕후의 아들 명종과 인순왕후가 안장된 강릉과 같은 묘역을 이루어 태강릉(泰康陵)이라 불린다. 태릉비의 건립연대는 1853년(철종 4)이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의 능표석인 《단경왕후온릉비(端敬王后溫陵碑)》도 소장되어 있다. 1807년(순조 7) 조선 제 11대 국왕 중중(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1476~1557)의 온릉(溫陵) 표석(表石)을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 9자를 소전풍(小篆風) 전서(篆書)로 새겼고, 음기는 6행의 내용을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썼다. 탁면이 깨끗하고 자획이 선명하며, 오금(烏金)도 고르게 입혀진 상태이다. 음기에는 단경왕후의 탄생, 사저(私邸)로 간 해와 승하한 해의 간지 및 연월을 기록하였다. 장지(葬地)는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으로 기록하였다. 음기의 마지막 행에는 1807년(순조 7)에 표석을 세웠음을 밝혔다.
한편 장서각에는 중종의 첫 번째 계비 《장경왕후희릉비(章敬王后禧陵碑)》 탁본도 소장되어 있다. 전면에는 소전체(小篆體)로 ‘조선국 장경왕후희릉(朝鮮國 章敬王后禧陵)’이라 새겼다.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장경왕후의 탄생, 숙의책봉(淑儀冊封), 왕비책봉(王妃冊封)과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지, 이장의 시기와 이장지, 향년 등을 기재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또한 장서각에는 김안로(金安老)가 찬진(撰進)한 『희릉지문(禧陵誌文)』이 있어 장경왕후의 생애를 묘도문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장경왕후희릉비》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자료적 가치]
문정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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