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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왕후희릉비(章敬王后禧陵碑)

자료명 장경왕후희릉비(章敬王后禧陵碑) 저자 윤씨(尹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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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8-4)
· 작성시기 1853
· 비고 2-5236
185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윤씨(尹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문(墓碑文)
· 크기(cm) 224.2 X 80.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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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중종(中宗)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능비(陵碑) 탁본(拓本).
원자료제목
· 표제장경왕후희릉비(章敬王后禧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1대 국왕 중종(中宗)의 계비(繼妃) 장경왕후(章敬王后)의 희릉(禧陵)에 세운 능표석(陵表石)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소장된 장경왕후희릉비 탁본은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각각 족자로 남아 있다. 두 점 모두 탁면에 오금(烏金)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米色) 비단으로 둘렀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심청색(深靑色) 비단으로 대었다. 천리에 미색 비단으로 만든 풍대(風帶)가 있다. 축두(軸頭)는 나무로 만들었다. 전체적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소전체(小篆體)로 ‘조선국 장경왕후희릉(朝鮮國 章敬王后禧陵)’이라 새겼다.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장경왕후의 탄생, 숙의책봉(淑儀冊封), 왕비책봉(王妃冊封)과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지, 이장의 시기와 이장지, 향년 등을 기재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한편 장서각에는 김안로(金安老)가 찬진(撰進)한 『희릉지문(禧陵誌文)』이 있어 장경왕후의 생애를 묘도문자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장경왕후희릉비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장경왕후(1491~1515)는 파평윤씨로 파원부원군(坡原府院君) 윤여필(尹汝弼)의 딸이다. 8세 때 어머니를 여의고 외종모(外從母)인 월산대군(月山大君)의 부인 박씨(朴氏)에 의해 양육되었다. 1506년(중종 원년)에 궁중에 들어가 숙의(淑儀)에 책봉되고, 이듬해에 원비(元妃) 단경왕후(端敬王后)가 폐위되어 쫓겨나자 왕비로 책봉되었다. 성품은 총명하고 자애로우며 덕이 많았으나 1515년(중종 10)에 세자(인종)를 낳은 뒤 병을 얻어 경복궁 별전에서 향년 25세를 일기로 승하하였다. 그 해 ‘숙신명혜(淑愼明惠)’라는 휘호와 ‘장경(章敬)’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시법(諡法)에서는 ‘온극령의(溫克令儀)’를 ‘장(章)’이라 하고 ‘숙야경계(夙夜警戒)’를 ‘경(敬)’이라 한다. 1546년(명종 1) 장경왕후를 중종의 묘(廟)에 부묘(祔廟)하며 ‘선소의숙(宣昭懿淑)’이라는 시호를 가상하였다. 소생으로 인종 외에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있는데, 효혜공주는 『희릉지문』을 찬진한 김안로의 아들 희(禧)와 결혼하였다.
세워진 희릉(禧陵)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다. 1515년(중종 10)에 태종의 헌릉 우강에 장사지냈으나 장지에 큰 돌이 있어 물이 고일 우려가 있다고 하여 1537년(중종 32)에 지금의 자리로 이장하였다. 희릉은 삼면이 담장으로 둘러싸여 있고, 난간석과 혼유석, 명등석, 망주석 각 한 쌍 및 문무석과 동물문양석 등이 조선 전기 왕릉의 전형적인 양식을 따르고 있다. 희릉은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과 같은 묘역에 조성되어 서삼릉이라 불린다.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중종의 원비 단경왕후의 능표석인 《단경왕후온릉비(端敬王后溫陵碑)》도 소장되어 있다. 1807년(순조 7) 조선 제 11대 국왕 중중(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1476~1557)의 온릉(溫陵) 표석(表石)을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 9자를 소전풍(小篆風) 전서(篆書)로 새겼고, 음기는 6행의 내용을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썼다. 탁면이 깨끗하고 자획이 선명하며, 오금(烏金)도 고르게 입혀진 상태이다. 음기에는 단경왕후의 탄생, 사저(私邸)로 간 해와 승하한 해의 간지 및 연월을 기록하였다. 장지(葬地)는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으로 기록하였다. 음기의 마지막 행에는 1807년(순조 7)에 표석을 세웠음을 밝혔다. 장서각에는 족자로 장황된 온릉비 탁본의 전면과 음기가 각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장경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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