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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흥부궁달리기적비(永興府宮闥里紀蹟碑)

자료명 영흥부궁달리기적비(永興府宮闥里紀蹟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조종영(趙鐘永), 조만영(趙萬永), 조만영(趙萬永),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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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남도 영흥군 (현재주소: 함경남도 영흥군 인흥면 성흥리)
· 작성시기 1829
· 비고 2-5224-1, 2-5224-2
182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 조선 왕족
찬자 조종영(趙鐘永) 1771 - 1829 조선 문신
서자 조만영(趙萬永) 1776 - 1846 조선 문신
전서자 조만영(趙萬永) 1776 - 1846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전185.5/음기186.0 X 전87.8/음기88.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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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29년(純祖 29)에 이성계(李成桂)가 성장한 마을에 세운 기적비(紀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영흥부궁달리기적비(永興府宮闥里紀蹟碑)
[내용 및 특징]
1829년(純祖 29)에 이성계의 성장기 마을인 함경도(咸慶道) 영흥군(永興郡) 궁달리(宮闥里)에 세운 기적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비문은 조종영(趙鐘永)이 짓고, 전면과 음기의 글씨는 조만영(趙萬永)이 썼다.
2-5224-1은 이 비석의 전면이다. ‘영흥부궁달리기적비(永興府宮闥里紀蹟碑)’라는 제액(題額)을 소전풍(小篆風) 전서로 썼다. 1-5224-4까지 모두 동일본이다. 2-5224-2는 이 비석의 음기이다. 서체는 단아한 소자해서(小字楷書)로 썼다.
영흥에서 동쪽으로 10리 위치에 덕흥사(德興寺)가 있다. 이 사찰은 이성계가 어릴 때 이모 최씨(崔氏)가 태조를 기르던 곳이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순조(純祖)가 세운 비석이다. 태조는 이 고을을 영흥부로 고쳐 불렀다. 영흥은 함경남도에 있는 지명으로 본래 고구려의 장령진(長嶺鎭)인데, 박평군(博平郡)이라고도 하였다. 고구려 초기에는 화주(和州)라 하였고, 공민왕 5년(1356)에 화주목(和州牧)이 되었고, 1369년 화녕부(和寧府)로 고쳤다. 조선에 들어와 태조는 영흥부(永興府)로 개칭, 1895년 영흥군(永興郡)이 된 이래 오늘에 이르고 있다.
1828년(순조 28) 10월 24일 실록의 기사에는 비변사에서 영흥 궁달리 태조 유적지에 비석을 세울 것을 건의한 내용이 실려 있어 이 비석의 건립배경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 예조에서 품신한 목록을 보니, 안변(安邊)의 유학(幼學) 원중혁(元重赫) 등이 올린 말을 낱낱이 들어 이르기를, ‘영흥(永興)에 있는 궁달리(宮闥里)는 바로 우리 태조 대왕을 길러낸 곳입니다. 성조(聖祖)의 유적이 지금까지도 아직 남아 있는데, 비석을 세워 후세에 전하려는 거조가 없었습니다. 흑석리(黑石里)의 예에 의하여 비석을 세우고 업적을 기록하는 것이 사리에 합당하니 묘당(廟堂)으로 하여금 품처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지금 북유(北儒)들의 상언을 보면 궁달리에 성조의 유적이 있다고 하였는데 그 일은 매우 귀한 것입니다. 그곳을 그대로 버려두어 그 사실이 인멸(湮滅)되어 전하지 못하도록 할 수는 없습니다. 태조께서 말을 달리고 공을 치던 장소에도 모두 그 자취를 기록하였고, 흑석리에도 역시 비석을 세웠으니, 이 예에 의거하여 이곳에도 성조의 유적(遺蹟)을 표하는 것이 실로 나라의 터전을 개시(開始)한 거룩한 업적을 천양(闡揚)하는 데에 합당하겠습니다. 사체(事體)가 지극히 중대하니, 본도의 도신으로 하여금 춘순(春巡)할 때에 그 기지(基址)를 봉심(奉審)하게 하여 다시 장달(狀達)하게 한 뒤에 비석을 세우는 역사를 거행하게 하소서.” 하니 순조가 그대로 따랐다고 하였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가 전하는데, 이 금석문과 같이 순조 29년(1829)에 세울 이성계 관련 금석문이다. 이성계(李成桂)가 항흥(咸興)과 홍원(洪原) 양계(兩界)의 함관령(咸關嶺) 아래에서 원군(元軍)을 물리친 일을 기리기 위해 1829년(純祖 29)에 건립한 기적비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당시 홍원(洪原)의 유사(儒士) 고영수(高榮秀)의 주청에 의해 세웠다. 달단동(韃靼洞) 태조(太祖)가 고려의 무인으로 있을 당시 원나라의 승상인 나하추(納哈出, ?~1381)과 크게 싸워 이긴 곳이다. 『고려사』에서는 공민왕 11년 7월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용비어천가』에도 전해지고 있다. 명칭은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로 조종영(趙鐘永)이 비문을 지었고, 서준보(徐俊輔)가 전면과 음기의 글씨를 썼다.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고려 말기에 심양에 자리 잡고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으며, 동북부 일대에 세력을 뻗쳤다. 1362년 고려 동북면의 쌍성(雙城)을 다시 손에 넣으려고 수만 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이성계는 함관령을 넘어 적의 집결지인 달단동(홍원군 남쪽 30리)을 기습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적군을 함흥평야로 유인하여 크게 무찔렀다. 나하추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달아났으며, 1368년 북원(北元)이 세워진 뒤 고려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고 좋은 말 등을 선사하여 화친하였다. 이 비는 이때의 전승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적비이다.
전면과 음기의 글씨를 쓴 조만영(1776∼1846)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그는 풍양 조씨 가문의 좌장(座長)이고 핵심 인물로서, 자신은 현직(顯職)을 사양하고 뒤에서 왕세자나 유주(幼主, 헌종)의 신변 보호와 왕실 안전을 명분으로 각 군영의 대장직을 차례로 역임, 오랫동안 군사권을 장악하여 조씨 세도의 군사적 배경을 이루었다. 따라서 그의 실력으로 볼 때, 정치 혁신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으나 안동김씨와의 정권 경쟁에만 급급, 민생 문제와 사회병폐를 도외시함으로써 사회적인 모순을 격화시키고 결과적으로 삼정문란(三政紊亂)을 초래했다는 후세의 비평이 있다. 글씨에 능해 이 금석문과 함께 임천(林川)의 《회양부사조신묘표(淮陽府使趙愼墓表)> 등이 전한다. 저서로 『동원인물고(東援人物考)』의 편술이 있다.
[자료적 가치]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와 함께 조선 후기 왕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각 이외에 이 비석의 탁본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희귀본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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