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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자료명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조종영(趙鐘永), 서준보(徐俊輔), 서준보(徐俊輔),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3-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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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남도 흥원군 (현재주소: 함경남도 홍원군 용운면 영상리)
· 작성시기 1829
· 비고 2-5223-1, 2-5223-2
182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 조선 왕족
찬자 조종영(趙鐘永) 1771 - 1829 조선 문신
서자 서준보(徐俊輔) 1770 - 1856 조선 문신
전서자 서준보(徐俊輔) 1770 - 1856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전214.3/음기212.5 X 전94.2/음기94.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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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29년(純祖 29)에 이성계(李成桂)의 무공(武功)을 기려 세운 기적비(紀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내용 및 특징]
이성계(李成桂)가 항흥(咸興)과 홍원(洪原) 양계(兩界)의 함관령(咸關嶺) 아래에서 원군(元軍)을 물리친 일을 기리기 위해 1829년(純祖 29)에 건립한 기적비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당시 홍원(洪原)의 유사(儒士) 고영수(高榮秀)의 주청에 의해 세웠다. 달단동(韃靼洞) 태조(太祖)가 고려의 무인으로 있을 당시 원나라의 승상인 나하추(納哈出, ?~1381)과 크게 싸워 이긴 곳이다. 『고려사』에서는 공민왕 11년 7월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며, 『용비어천가』에도 전해지고 있다. 명칭은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로 조종영(趙鐘永)이 비문을 지었고, 서준보(徐俊輔)가 전면과 음기의 글씨를 썼다.
2-5223-1은 탁본의 전면이다. 대자소전(大字小篆)으로 ‘달단동승전기적비(韃靼洞勝戰紀蹟碑)’ 8글자를 중앙에 배치하였다. 전서를 쓴 사람은 서준보이다. 축두(軸頭)는 옥축(玉軸)이다. 국화문양의 비단표구이며 풍대는 없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비교적 짧은 편이며, 좌우 사양(四鑲) 끝에 천리, 지리와 같은 비단으로 테두리를 둘렀다.
2-5223-2는 탁본의 음기이다. 찬자는 조종영이며 전면과 함께 서준보가 소자해서(小字楷書)로 썼다. 국화문 비단으로 장황하였고, 풍대는 없다. 천리와 지리가 짧은 편이며 좌우 사양 끝에 천리와 지리 같은 비단 테두리를 둘렀다.
원나라의 장수 나하추가 고려 말기에 심양에 자리 잡고 스스로 행성승상(行省丞相)이라 일컬으며, 동북부 일대에 세력을 뻗쳤다. 1362년 고려 동북면의 쌍성(雙城)을 다시 손에 넣으려고 수만명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오자 고려에서는 이성계를 동북면병마사로 삼아 방어하게 하였다. 이성계는 함관령을 넘어 적의 집결지인 달단동(홍원군 남쪽 30리)을 기습하여 이들을 격퇴하고, 적군을 함흥평야로 유인하여 크게 무찔렀다. 나하추는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북으로 달아났으며, 1368년 북원(北元)이 세워진 뒤 고려에 여러 차례 사신을 보내고 좋은 말 등을 선사하여 화친하였다. 이 비는 이때의 전승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기적비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전면 4점, 음기 4점으로 모두 8점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글씨를 쓴 서준보는 1790년(정조 14) 진사시에 장원하였고, 1794년 정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병조좌랑·홍문관수찬(弘文館修撰)·무안현감(務安縣監)·규장각직각(奎章閣直閣)·성천부사(成川府使)·이조참의 등을 거쳐 1819년(순조 19) 대사간이 되었다. 그 뒤 강화부유수(江華府留守)를 지내고 1823년 진하부사(進賀副使)가 되어 정사 박종훈(朴宗薰)과 더불어 청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이조참판·충청도관찰사를 지내고 1828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며 1830년 병조판서를 지내고 1831년 동지정사(冬至正使)가 되어 다시 청나라를 다녀왔다. 그 뒤 좌빈객(左賓客)·홍문관제학·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이조·공조·형조의 판서 등을 지내고 1854년(철종 5) 회방(回榜 : 대과급제 60주년)을 맞아 철종으로부터 궤장과 이등악(二等樂)을 하사받았고 지사(知事)에서 판부사(判府事)로 특별 가자되어 기로소에 들어갔다. 글씨에 조예가 깊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영흥부궁달리기적비(永興府宮闥里紀蹟碑)》가 소장되어 있다. 1829년(純祖 29)에 이성계의 성장기 마을인 함경도(咸慶道) 영흥군(永興郡) 궁달리(宮闥里)에 세운 기적비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비문은 조종영(趙鐘永)이 짓고, 전면과 음기의 글씨는 조만영(趙萬永)이 썼다. 조선 후기 태조의 추숭사업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자료적 가치]
고려 말 원나라와의 관계와 당시의 지역적인 정황을 연구하기 위한 사료로서 가치가 있다. 또한 조선 후기 왕실 추숭사업의 일면을 확인할 수 있다. 장서각 이외에 이 비석의 탁본이 확인되지 않으므로 희귀본으로서의 가치도 있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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