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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종대왕건릉[합봉]비(正宗大王健陵[合封]碑)

자료명 정종대왕건릉[합봉]비(正宗大王健陵[合封]碑) 저자 이산(李祘), 김씨(金氏), 남공철(南公轍),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9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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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화성시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1-1)
· 작성시기 1807
· 비고 2-5292-1, 2-5292-2
180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피전자 김씨(金氏) 1753 - 1821 조선 왕후
찬자 남공철(南公轍) 1760 - 1840 조선 문신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57.4/음기267.9 X 전107.8/음기110.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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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정조(正祖)와 효의왕후(孝懿王后)의 능인 건릉(健陵)에 세워진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정종대왕건릉[합봉]비(正宗大王健陵[合封]碑)
[내용 및 특징]
1821년(순조 21)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사망한 후 정조가 묻힌 건릉(健陵)에 합봉하고 비각 안에 표석을 세워 탁본하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건릉은 경기도 화성시 효행로에 있는 조선 제22대 국왕 정조와 부인 효의왕후 김씨를 합장한 왕릉이다. 정조의 아버지로 사후에 왕으로 추존된 장조(葬祖, 사도세자)와 헌경왕후(獻敬王后) 홍씨의 합장묘인 융릉(隆陵)과 함께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206호로 지정되었다.
건릉은 봉분 안에 2실을 갖춘 합장릉이다. 봉분을 빙 둘러 12칸의 난간석이 에워싸고 있으며, 난간석의 기둥에는 12지 방위가 문자로 새겨졌다.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다. 봉분 앞에 상석 1좌가 있고, 그 양측에 망주석 1쌍이 서 있다. 봉분 주위로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을 교대로 배치하였고, 봉분 바깥쪽으로 3면의 곡장(曲墻; 나지막한 담)을 둘렀다. 봉분 아랫단에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과 장명등 1좌가 있으며, 그 아랫단에는 무인석·석마 각 1쌍이 있다. 금관조복을 입고 있는 문인석은 사실적인 조각기법이 돋보인다. 능이 조성된 언덕 아래에 정자각과 1992년 복원한 비각이 있으며, 정자각 남쪽 참도(參道)가 시작되는 곳에 홍살문이 있다. 홍살문에서 정자각에 이르는 길을 참도(參道)라 하는데 융릉과 마찬가지로 정자각까지 참도 좌우 양측에 박석(薄石)을 깔아놓은 것이 특징적이다. 2002년 정자각 서쪽에 수라간을 복원하였으며, 능역 남측 대로변에 재실이 있다.
표석의 전면은 소전(小篆)으로 ‘조선국/정종대왕건릉/효의왕후부좌(朝鮮國/正宗大王健陵/孝懿王后祔左)’를 새겼다. 음기에서는 우측에 정종대왕, 좌측에 효의왕후의 간략한 이력을 적었다. 우선 정종(正宗)의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대왕(文成武烈聖仁莊孝大王)’이라 하고, 숭정(崇禎) 기원후(紀元後) 125년(1752)에 탄생, 1759년 책봉, 1775년 왕세손으로 청정, 1776년 즉위, 1800년 승하, 11월 6일에 화성(華城)에서 장사지냈음을 밝혔다. 재위기간은 24년, 향년 49세였다.
좌측에서는 효의왕후의 시호를 ‘예경자수효의왕후(睿敬慈粹孝懿王后)라 하고, 숭정 기원후 126년(1753)에 탄생, 1762년 세손빈 책봉, 1766년 왕비 책봉, 1800년 순조가 등극하면서 왕대비로 존봉, 1821년 승하, 건릉에 부장하였음을 밝혔다. 69세의 수를 누렸다. 음기의 마지막에는 이 표석을 세운 해의 연월을 적었다. 음기는 남공철(南公轍)이 지었다.
피전자 정조의 이름 산(祘), 자 형운(亨運), 호는 홍재(弘齋)이다. 영조의 손자로 아버지는 장헌세자(莊獻世子: 思悼世子), 어머니는 영의정 홍봉한(洪鳳漢)의 딸 혜경궁홍씨(惠慶宮洪氏: 惠嬪)이다. 1759년(영조 35) 세손에 책봉되고, 1762년 2월에 좌참찬 김시묵(金時默)의 딸 효의왕후(孝懿王后)를 맞아 가례를 치렀다. 이해 5월에 아버지가 뒤주 속에 갇혀 죽는 광경을 목도해야 했다. 1764년 2월 영조가 일찍 죽은 맏아들 효장(孝章)세자의 뒤를 이어 종통을 잇게 하였다. 정조는 재위기간 동안 과거제도 개선을 위해 대과(大科)는 규장각을 통해 국왕이 직접 관장하여 많은 과폐를 없앴다. 전제(田制) 개혁에도 뜻을 두어 조선 초기의 직전법에 대해 큰 관심을 보였다. 규장각 제도를 일신하여 왕정 수행의 중심기구로 삼았다.
정조는 타계하기 한 해 전에 아버지 장헌세자의 저술을 손수 편집하여 예제(睿製) 3책을 남겼고 자신의 저술·강론 등도 수년 전부터 각신들에게 편집을 명하여 생전에 『홍재전서(弘齋全書)』 100권으로 정리된 것을 보았으며, 1814년에 순조가 규장각에 명하여 이를 간행하였다. 유언에 따라 현륭원 옆에 묻고 건릉(健陵)이라 했다. 시호를 문성무열성인장효(文成武烈聖仁莊孝)라고 하였으며, 왕조가 대한제국으로 바뀐 뒤 1900년에 선황제(宣皇帝)로 추존되었다. 황제로 추존하면서 건릉에 세운 표석인 ‘정조선황제건릉비(正祖宣皇帝健陵碑)’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피전자 효의왕후 김씨(1753~1821)는 영조 29년 청풍김씨(淸風金氏) 청원부원군(淸原府院君) 김시묵(金時黙)의 딸로 태어나 10세 때에 당시 왕세손이었던 정조의 빈이 되었다가, 1776년 정조 즉위와 함께 왕비에 책봉되었다. 성품이 온화하고 겸손하여 조모격인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와 혜경궁 홍씨를 극진히 섬겨 궁궐 내에서의 존경의 대상이 되었다. 슬하에 소생이 없이 안타까운 생을 보냈지만 1790년(정조 14) 기꺼이 수빈박씨의 소생을 원자(元子, 후의 純祖)로 삼았다. 일생을 검소하게 지냈으며, 수차에 걸쳐 존호(尊號)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모두 거절했고, 1820년(순조 20) 68세가 되어 여러 대신들이 하수연(賀壽宴)을 베풀고자 했으나 사양하였다. 그 후 순조 21년까지 여생을 보내다가 69세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찬자 남공철(南公轍, 1760~1840)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문장가이다. 1817년 우의정, 1821년 좌의정, 1823년 영의정에 올랐고, 1833년 봉조하가 되었다. 당시 제일의 문장가로 시와 글씨에 뛰어나 많은 금석문과 비갈을 썼으며, 경전을 연구하고 구양수(歐陽脩)의 글을 숭상하고 본받았다. 문집에 『금릉집(金陵集)』, 저서에 『귀은당집(歸恩堂集)』(10권) 『고려명신전(高麗名臣傳)』(12권), 『영옹속고(穎翁續藁)』(5권), 『영은문집(瀛隱文集)』, 『영옹재속고(穎翁再續稿)』(3권), 『독례록(讀禮錄)』 등이 있다.
[자료적 가치]
정조와 효의왕후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9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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