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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혜왕후순릉비(恭惠王后順陵碑)

자료명 공혜왕후순릉비(恭惠王后順陵碑) 저자 한씨(韓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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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작성시기 1817
· 비고 2-5234-1, 2-5234-2
181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한씨(韓氏) 1456 - 1474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198.0/음기230.1 X 전82.0/음기70.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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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표석(陵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공혜왕후순릉비(恭惠王后順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9대 국왕 성종(成宗)의 원비(元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순릉(順陵)에 세운 능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순릉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에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의 공릉(恭陵), 진종(眞宗)과 효순왕후(孝純王后)의 영릉(永陵)과 같은 묘역에 조성되어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표석의 건립연대는 1817년(순조 17)이다. 비신의 높이는 164㎝, 폭은 64㎝, 두께는 31㎝이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순릉비 탁본은 전면 2점과 음기 1점이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청구기호 2-5234-1은 탁면에 오금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좌우만 미색 비단을 둘렀을 뿐, 탁면 아래 위에는 청색(靑色) 비단으로 만든 천리(天裏)와 지리(地裏)가 맞닿아 있다. 천리에는 미색 비단으로 만든 풍대(風帶)가 두 줄 있다. 2-5234-1,2와 2-5234-2는 족자 형태가 같아 본디 한 짝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두 점 모두 탁면에 오금을 먹였고, 백색의 종이로 천리(天裏)와 지리(地裏), 사양(四鑲)의 구분 없이 장황하였으며, 풍대(風帶)는 없다. 탁면의 가장자리에 백록색 종이로 윤선(輪線 )을 둘렀다. 축두는 나무로 만들었으며 보존상태가 좋다.
표석의 전면에는 소전체로 ‘조선국/공혜왕후순릉(朝鮮國/恭惠王后順陵)’이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공혜왕후의 탄생과 가례, 왕비 책봉과 승하, 장례의 시기, 장지, 향년 등을 기재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음기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공혜왕후는 상당부원군 충성공 한명회(上黨府院君 忠成公 韓明澮)와 황려부부인 민씨(黃驪府夫人 閔氏)의 막내딸로 1456년 연화방(蓮花坊)에서 태어났다. 1467년 1월 12일 세조의 손자이자 의경세자의 아들인 한 살 연하의 잘산군(乽山君)과 혼인했다. 이 해에는 잘산군의 형 월산군과 누이 명숙공주도 혼인을 했는데 한명회의 집에 예단이 보내진 것은 월산군의 혼례가 있은 지 5일만이었다. 한씨는 잘산군과 혼인 후 천안군부인(天安郡夫人)으로 불리다 1469년 잘산군이 예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에 책봉되었다. 인수대비는 며느리들에게 무척 엄격한 시어머니였는데 한씨에게 중국의 현모양처들에 관한 이야기인 『열녀전』을 읽게 하는 등 유교 윤리에 따라 철저히 교육했다. 한씨가 자식을 두지 못하자 성종은 후궁을 들였는데 한씨는 싫어하는 내색 없이 그들에게 옷을 준비해서 내리고 그 뒤에도 패물 등을 선물했다. 한씨는 1473년 음력 7월에 병으로 친정(한명회의 집)으로 거처를 옮겼는데, 성종이 하루 걸러 한명회의 집에 들러 그녀의 상태를 살폈다. 이후 회복하여 궁궐로 돌아왔으나, 이 해 12월에 병이 다시 도지고 말았다. 병이 낫지 않을 것을 예감한 왕후 본인의 요청으로 1474년 음력 3월에 창덕궁 구현전(求賢殿)으로 처소를 옮겼고, 성종과 삼대비(정희왕후, 소혜왕후, 안순왕후)가 날마다 구현전으로 가 그녀를 보살폈다. 친정 부모인 한명회와 부인 민씨도 입궐해 병을 돌보았지만 차도가 없었고 한씨는 죽기에 앞서 부모가 며칠째 밥을 먹지 못하는 것을 보고 밥을 먹도록 명했다. 1474년 음력 4월 15일, 19세의 젊은 나이로 훙서하였다. 이에 성종은 공경하고 유순하게 윗사람을 섬김을 ‘공(恭)’이라 하고, 너그럽고 부드러우며 인자함을 ‘혜(惠)’라 하여 공혜왕후(恭惠王后)의 시호를 올렸으며, 능호는 순혼(順魂, 나중에 순릉이 되었다), 전호는 소경전(昭敬殿)으로 정하였다. 연산군 4년(1498년)에는 휘의신숙(徽懿愼肅)이라는 존호가 더해지기도 했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장순왕후공릉비』가 소장되어 있다. 이 비는 조선 제 8대 국왕 예종(睿宗)의 원비(元妃) 장순왕후(章順王后)의 공릉(恭陵)에 세운 표석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장순왕후는 공혜왕후의 친언니이다. 이 표석은 표석은 1817년(정조 11)에 세워진 것이다.
[자료적 가치]
공혜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9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성종실록(成宗實錄)』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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