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헌경혜빈현륭원비(獻敬惠嬪顯隆園碑)

자료명 헌경혜빈현륭원비(獻敬惠嬪顯隆園碑) 저자 홍씨(洪氏), 미상, 홍현주(洪顯周), 한용구(韓用龜),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9-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화성시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작성시기 1816
· 비고 2-5289-1, 2-5289-2
181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홍씨(洪氏) 1735 - 1815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홍현주(洪顯周) 미상 - 미상 조선 부마(駙馬)
전서자 한용구(韓用龜) 1747 - 1828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190.7/음기192.3 X 전82.2/음기82.6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현륭원(顯隆園)에 세운 혜경궁(惠慶宮) 홍씨(洪氏)의 표석(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헌경혜빈현륭원비(獻敬惠嬪顯隆園碑)
[내용 및 특징]
1816년(순조 16)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祖)의 빈(嬪) 혜빈(惠嬪) 홍씨(洪氏)가 현륭원(顯隆園)에 합봉(合封)될 때 세운 표석을 탁본하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헌경혜빈현륭원비’ 탁본은 전면과 음기가 각각 5점씩 소장되어 있다. 청구기호 2-5289-1 계열과 2-5289-2 계열이다. 모두 탁면에 오금(烏金)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으며,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청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천리에는 미색 비단으로 만든 두 줄의 풍대(風帶)를 붙였고, 축두(軸頭)는 옥을 깎아 끼웠다.
탁본의 전면에는 소전(小篆)으로 ‘조선국/헌경혜빈부좌(朝鮮國/獻慶惠嬪祔左)’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헌경혜빈의 탄생과 왕세자 책봉 및 여러 차례 받은 존호, 훙서와 향년, 시호, 장례시기와 장지 등을 기재하였다. 전면의 전서는 한용구(韓用龜)가 썼고, 음기는 홍현주(洪顯周)가 썼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양주남(楊州南)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峯山), 즉 현재의 서울시 동대문구 휘경동에 장사지내고 묘호(墓號)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1776년(정조 즉위) 수은묘를 원(園)으로 승격시켜 이름을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1789년(정조 13)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로 천봉하고 원호(園號)를 현륭원(顯隆園)으로 바꾸었다. 이후 1816년(순조 16) 혜빈 홍씨가 승하하자 동원(同原)에 합봉하였다. 1899년(광무 3)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융릉은 현재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피전자 헌경왕후의 본관은 풍산(豐山)이며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사도세자(思悼世子)라고도 불리는 장헌세자(莊獻世子)의 빈(嬪)으로 조선의 22대 왕인 정조(正祖)의 생모이다. 영조 때 영의정 등을 지낸 홍봉한(洪鳳漢)의 차녀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한산이씨(韓山李氏)이다. 조부는 예조판서를 지낸 홍현보(洪鉉輔)이며, 홍낙인(洪樂仁), 홍낙신(洪樂信), 홍낙임(洪樂任), 홍낙륜(洪樂倫) 등의 남형제가 있었다.
1744년(영조 20) 10세의 나이로 영조의 아들인 장헌세자의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입궁했으며, 1750년(영조 26) 장남인 의소세손(懿昭世孫, 1750~1752)을 낳았고, 1752년(영조 28) 차남인 정조를 낳았다. 그리고 뒤이어 청연공주(淸衍公主, 1754~1814)와 청선공주(淸璿公主, 1756~1802)를 낳았다. 하지만 맏아들인 의소세손은 3살 만에 죽었으며, 1749년부터 영조를 대신해 대리청정(代理聽政)을 하던 남편 장헌세자도 1762년(영조 38) 영조의 노여움을 사서 뒤주에 갇혀 죽었다. 당시 영조는 장헌세자를 폐하여 서인(庶人)으로 삼겠다는 명을 내리고 한밤중에 세자빈이던 헌경왕후와 세손인 정조 등을 모두 친정인 홍봉한의 집으로 보내라고 명했다. 헌경왕후는 장헌세자가 죽은 뒤에야 궁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1776년 정조는 즉위한 뒤에 혜빈궁(惠嬪宮)의 명칭을 혜경궁(惠慶宮)으로 바꾸었으며, 1783년(정조 7)에는 자희(慈禧)와 효강(孝康)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1795년 회갑을 맞은 헌경왕후는 회고록인 『한중록』을 썼는데, 이 작품은 『인현왕후전』, 『계축일기』와 더불어 궁중문학을 대표하는 작품으로 평가된다. 한경왕후는 1816년 1월 13일(순조 15년 12월 15일)에 사망했으며, 경기도 화성의 융릉(隆陵)에 남편인 장헌세자와 함께 합장되었다. 순조는 그녀에게 헌경(獻敬)이라는 시호를 올렸으며, 고종 때인 1899년에는 의황후(懿皇后)라는 시호가 올려졌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에는 1789년(정조 13) 현륭원으로 천봉(遷奉)․개호(改號)하면서 건립한 현륭원비가 소장되어 있다. 전면에는 전서체로 ‘조선국/사도장헌세자/현륭원(朝鮮國/思悼莊獻世子/顯隆園)’이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사도세자의 탄생, 왕세자 책봉, 대리청정 및 훙서 시기, 향년, 시호, 장례시기와 장지를 기재하고, 다음으로 시호, 존호의 추상과 가상, 원소의 천봉 등을 시기순으로 기재하였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비문의 내용과 『정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면 1789년(정조 13)임을 알 수 있다.
현륭원비와 관련하여 장서각 소장 『현륭원등록(顯隆園謄錄)』(2-2381)은 원소 주변에 대해 원소도감과 수원부(水原府)에서 진행한 각종 사업을 1794년(정조 18)부터 1797년(정조 21)까지 기록한 등록이다. 또한 『현륭원등록(顯隆園謄錄)』(2-2382)은 1857년(철종 8)부터 1862년(철종 13)까지 현륭원의 출입 문서를 수록한 등록으로, 19세기 중연 현륭원의 관리 실태를 보여준다.
한편 헌경혜빈의 장례와 관련하여 참고할 만한 자료는 다음과 같다. 장서각 소장 『헌경혜빈상례등록(獻慶惠嬪喪禮謄錄)』(2-3030)은 혜빈의 승하로부터 1818년(순조 18) 담제를 지낼 때까지 삼년상을 치르는 동안의 절치와 사용된 물품 등을 볼 수 있고, 『혜경궁상례의주등록(惠慶宮喪禮儀註謄錄)』(2-3036)에는 혜빈의 승하로부터 신주를 경모궁(景慕宮)에 부궁(祔宮)하기까지의 장례의식을 엿볼 수 있다. 규장각 소장 『[헌경왕후(獻慶王后)]현륭원원소도감의궤(顯隆園園所都監儀軌)』(13616~9)에서는 1815년(순조 15) 12월부터 이듬해 3월까지 헌경왕후를 현륭원에 합봉할 때 공역과 관련된 기록이다.
[자료적 가치]
혜경궁 홍씨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9세기 초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혜경궁 사후 각종 추숭으로 인한 호칭의 변화와 능제의 변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莊祖]永祐園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624~13626)
『[莊祖]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27~13630)
『[莊祖]顯隆園遷園儀軌』(규장각 13629)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3)
『顯隆園誌文』(장서각 2-4010)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1)
『獻慶惠嬪喪禮謄錄』(장서각 2-3030)
『惠慶宮喪禮儀註謄錄』(장서각 2-3036)
『獻慶王后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16~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