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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

자료명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 저자 이연(李昖), 김희순(金羲淳), 서영보(徐榮輔), 서영보(徐榮輔),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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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평안북도 박천군 (현재주소: 평안북도 박천군 박천읍)
· 작성시기 1808
· 비고 2-5242-1, 2-5242-2
1808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연(李昖) 1552 - 1608 조선 왕족
찬자 김희순(金羲淳) 1757 - 1821 조선 문신
서자 서영보(徐榮輔) 1759 - 1816 조선 문신
전서자 서영보(徐榮輔) 1759 - 1816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34.5/음기234.8 X 전102.4/음기102.8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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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1808년(순조 8) 선조(宣祖)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박천(博川)에 세운 사적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
[내용 및 특징]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의주(義州)로 몽진(蒙塵)하는 길에 평안북도 박천에 머물렀던 사적을 기록한 비문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를 따로 탁본하여 두 개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탁본면의 가장자리에 구름문 비단을 대었는데,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청색이고 사양(四鑲)은 적색이다. 풍대(風帶)는 원래 있었으나 결락되었으며, 축두(軸頭)는 목축(木軸), 봉(棒)은 비단을 댄 면 밖으로 돌출되어있지 않다. 탁본면 상단에 박락이 심하고 좀이 슬어 보존상태가 좋은 편은 아니지만, 글자를 판독하기에는 무리가 없다. 전면은 대자소전(大字小篆)으로 ‘박천성적비(博川聖蹟碑)’가 씌여 있고, 음기는 소자해서(小字楷書)이다. 찬자는 김희순(金羲淳), 서자(書者) 및 전서자(篆書者)는 서영보(徐榮輔)이다.
비문의 내용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첫째, 이 석비를 건립하게 된 경위에 대해 기술하였고, 둘째, 이 비를 건립한 의의에 대해 언급하였고, 셋째, 몽진의 어려움 속에서 끝까지 종묘사직을 지키려했던 선조의 기적(紀蹟)과 왕과 왕후를 첨망애대(瞻望愛戴)하였던 박천읍민의 충정을 기리는 명문(銘文)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는 의주로 몽진하는 과정에서 선조의 비인 의인왕후(懿仁王后)를 북방으로 먼저 피난시켰다. 북쪽에 이미 왜구가 침입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운산군수(雲山郡守) 성대업(成大業)을 보내어 달려가 맞이하게 하여 6월 14일 박천에서 극적으로 조우하였으며, 박천읍민들은 피난길에 있던 왕과 왕후를 극진히 대접하였는데,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이 이 비문 전반에 걸쳐 실려 있다.
『선조수정실록』 25년 6월 1일의 기록을 보면 이항복(李恒福, 1566~1618)이 선조에게 의주로 피난할 것을 극언한 것과 함께 운산군수 성대업을 보내어 왕후를 맞이하게 한 사실, 그리고 세자에게 종묘사직을 받들고 분조(分朝)할 것을 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당시의 긴박했던 상황이 상세히 실려 있으며, 『선조실록』 25년 6월 14과 15일 기사에는 선조가 양 이틀간에 걸쳐 박천에 머물렀던 사실이 기록되어 있어 이 비석의 기록과 일치한다.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몽진길에 주필하였던 곳은 박천뿐만 아니라 정주(定州), 해주(海州) 등 여러 곳이며, 박천에서 주필하였다는 기록도 1592년(선조 25) 분만 아니라 이듬해에도 있었고, 같은 해인 경우에도 여러 차례 있었음을 문헌기록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이 비문과 『순조실록』 7년 9월 6일의 기사를 비교해 보면 박천에 거주하던 유생의 청에 따라 순조가 홍문관제학 김희순(金羲淳, 1757~1832)에게 명하여 이 비문을 짓게 하였음을 알 수 있다. 『순조실록』 9년 3월 25일 기록에는 평안감사 서영보(徐榮輔, 1759~1816)가 성적비를 영건하였다고 임금께 보고한 기록이 있어 1808년(순조 8)에 건립하였다는 비문의 기록과 일치하지 않는다. 두 기록을 비교할 때, 이 석비는 1808년(순조 8) 말에서 1809년(순조 9) 초 사이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전면의 전서는 획이 가는 소전체로 당(堂) 이양빙(李陽冰)의 소수(疎瘦)하면서도 순경(淳勁)한 필법이 드러난다. 이는 당시 조선에 이미 전래되었던 이양빙의 전서를 나름대로 잘 터득한 필법이라 할 수 있다. 음기에 쓴 비문의 자체는 안진경체의 해서를 기반으로, 수경(瘦勁)하면서도 단아한 획법을 가미한 점이 돋보인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서영보의 필적 《순조어제자경전기(純祖御製慈慶殿記)》, 《정순왕후가상존호옥책문(貞純王后加上尊號玉冊文)》, 《서영보필첩(徐榮輔筆帖)》 등을 보면 위에 언급한 특징이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 당시 몽진의 경로와 더불어 주필할 당시의 지역적인 정황을 연구하기 위한 사료로서 가치를 가진다. 또한 서영보의 필적이 중국에서 유입된 서풍을 온전히 구사하고 있고, 그의 다른 필적에도 이러한 특징이 여실히 드러난다는 점에서 이들과의 비교를 통해 19세기 초반 한국서예사의 단면을 살펴볼 수 있는 자료적 가치도 함께 지니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선조수정실록(宣祖修整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한국지리지총서․읍지(평안도편)』 한국학문헌연구소 편 아세아문화사, 1986.
『박천군지』 박천군민회, 196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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