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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경왕후온릉비(端敬王后溫陵碑)

자료명 단경왕후온릉비(端敬王后溫陵碑) 저자 신씨(愼氏), 미상, 박윤수(朴崙壽), 김이도(金履度), 조윤대(曹允大),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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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양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양주시 장흥면 일영리 산19)
· 작성시기 1807
· 비고 2-5235-1, 2-5235-2
180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신씨(愼氏) 1487 - 1557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박윤수(朴崙壽) 1753 - 1824 조선 문신
서자 김이도(金履度) 1750 - 1813 조선 문신
전서자 조윤대(曹允大) 1748 - 1813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13.5/음기213.5 X 전64.7/음기67.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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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중종(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의 온릉(溫陵)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단경왕후온릉비(端敬王后溫陵碑)
[내용 및 특징]
1807년(순조 7) 조선 제 11대 국왕 중중(中宗)의 비(妃) 단경왕후(端敬王后) 신씨(愼氏, 1476~1557)의 온릉(溫陵) 표석(表石)을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단경왕후온릉(朝鮮國/端敬王后溫陵)’ 9자를 소전풍(小篆風) 전서(篆書)로 새겼고, 음기는 6행의 내용을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썼다. 탁면이 깨끗하고 자획이 선명하며, 오금(烏金)도 고르게 입혀진 상태이다. 음기에는 단경왕후의 탄생, 사저(私邸)로 간 해와 승하한 해의 간지 및 연월을 기록하였다. 장지(葬地)는 양주(楊州) 서산(西山) 장흥면(長興面) 수회동(水回洞)으로 기록하였다. 음기의 마지막 행에는 1807년(순조 7)에 표석을 세웠음을 밝혔다. 장서각에는 족자로 장황된 온릉비 탁본의 전면과 음기가 각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족자는 전면과 음기가 약간 다른 형식으로 장황되어 있다. 전면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백색 종이를 대었고, 사양(四鑲) 부분은 황색 비단을 붙였다. 음기는 천리와 지리 및 사양의 구분 없이 모두 백색 종이를 대어 장황하였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을 달았으며, 목축 좌우의 마구리에는 둥글게 깎은 옥을 부착하였다. 목축과 옥의 연결부위는 비단으로 감아 보이지 않게 하였다. 장서각 소장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의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온릉표석전면․음기족자(溫陵表石前面․陰記簇子)’가 각 한 점씩 소장된 기록이 있어 이 탁본은 본래 봉모당 소장품이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온릉 표석 음기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권12에 실려 있다.
『순조실록』6년 9월 24일 기사에는 온릉령(溫陵令) 모달겸(牟達兼)의 상소로 능비가 세워졌음이 확인된다. 능침에 비각을 세우는 것은 본래 국조(國朝)의 상전(常典)이자만, 온릉에만 유독 비각이 없음을 들어 상소한 것이다. 이에 순조는 온릉에 비각을 세우는 일은 예조로 하여금 대신들에게 문의하여 처리하도록 지시하였다.
이 비석에는 전면의 전서를 쓴 사람과 음기의 해서를 쓴 사람에 대한 기록이 없다. 그러나 『순조실록』 7년 4월 18일 기사에는 온릉에 표석을 세울 때 서사관 등에게 시상한 기록이 있다. 온릉의 표석을 세울 때의 전문서사관(篆文書寫官)이었던 조윤대(曹允大)에게는 숭록대부(崇祿大夫)를, 해자서사관(楷字書寫官) 박윤수(朴崙壽), 김이도(金履度)에게는 가의대부(嘉義大夫)를 가자(加資)하고, 감독했던 당상과 도청 등에게는 차등 있게 상을 내렸다는 사실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이 비문의 전면과 음기는 서사관들이 썼음을 알 수 있다.
단경왕후는 책봉된 지 7일 만에 폐위되었는데 중종반정(中宗反正)으로 인해 반정을 반대했던 아버지 신수근(愼守勤)이 죽임을 당하면서였다. 그 후 1557년(명조 12) 사저에서 71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친가의 선영(先塋)에 묻혔다가, 1739년(영조 15)에 복위되어 ‘단경(端敬)’의 시호를 받았다.
단경왕후 신씨는 복위되기 이전에 신씨가문의 봉사(奉祀)를 받다가 1698년(숙종 24) 문신 신규(申珪)가 복위를 청하여 사당을 지어 제사하게 되었다. 이때 신규는 죽음을 각오하고 소를 올려 세조에 의해 죽은 노산군(魯山君)을 복위할 것과, 중종반정때 역적의 딸이라는 이유로 폐출당한 신씨를 복위할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노산군에게는 단종이라는 존호가 올려졌고, 묘소는 장릉으로 추봉되었으나 신씨의 복위는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 뒤 1739년(영조 15)에 김태남(金台南)의 상소에 의해 단경왕후로 복위도고 묘소는 온릉으로 추봉되었다.
당시 온릉은 추봉되었지만 표석은 세워지지 않았다. 『온릉봉릉도감의궤(溫陵奉陵都監儀軌)』(장서각, 귀2-2351)에 의하면 능호가 주어지기 전에는 ‘폐비신씨지묘(廢妃愼氏之墓)’라는 표석이 있었으나 식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고 하며, 이후 36자가 새겨진 각석의 표석이 있었으나 봉릉 때에 혼유석 아래에 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51년 6월 6일 기사에 의하면 운봉군(雲峰君)이 상소하여 공릉(恭陵), 순릉(順陵), 온릉(溫陵)에 비석을 세울 것을 청하여 영조로부터 명년 봄을 기다려 거행하겠다는 승낙을 받아냈지만 실행되지는 못했다. 현재의 비문은 1807년(순조 7)에 세운 것인데, 단경왕후가 세상을 떠난 지 250년, 온릉의 봉릉 이후 68년 만에 세워진 것이다.
[자료적 가치]
단경왕후의 폐위와 복위, 봉릉과 비석의 건립 등 왕실에서의 정치적 사건과 금석문 제작의 관련성을 함께 엿볼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19세기 초반 왕실의 추숭과 관련한 금석문의 제작과 장황방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순조실록(純祖實錄)』
『온릉봉릉도감의궤(溫陵奉陵都監儀軌)』(장서각, 귀2-2351)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온릉지(溫陵志)』(장서각 2-4455)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하 /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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