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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지대비(遲遲臺碑)

자료명 지지대비(遲遲臺碑) 저자 이산(李祘), 서영보(徐榮輔), 윤사국(尹師國), 홍명호(洪明浩),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9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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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수원시 (현재주소: 경기도 수원시 장안구 이목동)
· 작성시기 1807
· 비고 2-5294-1, 2-5294-2
180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찬자 서영보(徐榮輔) 1759 - 1816 조선 문신
서자 윤사국(尹師國) 1728 - 1809 조선 문신
전서자 홍명호(洪明浩) 1736 - 1819 조선 문신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추모비(追慕碑)
· 크기(cm) 상184.6/하182.1 X 상85/하92.3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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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지지대(遲遲臺)에 세운 사적비(事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지지대비(遲遲臺碑)
[내용 및 특징]
1807년(순조 7) 세운 지지대비(遲遲臺碑)를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본래의 비석은 정조(正祖)의 지극한 효성을 추모하고 본받기 위하여 화성 어사 신현(申絢)이 건립하였다. 홍문관제학(弘文館提學) 서영보(徐榮輔)가 찬(撰)하고, 전판돈녕부사겸판의금부사(前判敦寧府使兼判義禁府使) 윤사국(尹師國)이 글씨를 쓰고, 수원부유수겸총리사(水原府留守兼總理使) 홍명호(洪明浩)가 두전(頭篆)을 썼다. 비의 높이는 150㎝, 너비는 60㎝이다. 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4호이다. 한국전쟁 당시 격전으로 비신의 곳곳에 탄흔이 남아 있고, 비문이 결락(缺落)된 곳도 나타난다.
정조는 부왕(父王) 장헌세자(莊憲世子)의 원침(園寢)인 현륭원(顯隆園) 전배(展拜: 종묘·능침 등에 참배함)를 마치고 환궁하는 길에 지지대에서 행차를 멈추게 하였는데, 이곳에서 멀리 현륭원이 있는 화산(花山)을 바라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곳에서 현륭원 쪽을 뒤돌아보면서 떠나기를 아쉬워하였다고 한다. 이때 정조의 행차가 느릿느릿 하였다 하여 이곳의 이름을 한자의 느릴 지(遲)자 두 자를 붙여 지지대(遲遲臺)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비문에서 ‘숭정기원후일백팔십년정묘십이월일입(崇禎紀元後一百八十年丁卯十二月日立)’이라는 기록으로 1807년(순조 7) 12월에 건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장서각 소장 탁본은 민무늬 비단으로 장황한 족자이며, 풍대(風帶)가 있고, 목축(木軸)을 달았다. 보존상태가 좋지 않아 두전을 비롯한 탁면 상단으이 박락이 심하고, 표죽 양쪽 끝 비단으로 때웠으며, 천리(天裏) 우측에 좀구멍이 다수 있다.
비문의 내용 중 “우리 전하께서 능원을 살피시고 해마다 이 대를 지나며 슬퍼하시고 느낌이 있어 마치 선왕을 뵙는 듯 하시어 효심을 나타내심에 여기에 새기게 하시니, 선왕께서 조상의 근본에 보답하고 너그러운 교훈을 내리시는 정성과 우리 전하께서 선대의 뜻과 일을 이어 받으시는 아름다움을 여기에 그 만의 하나로 상고했도다.”라는 글에서 정조의 애틋한 심정이 드러난다.
찬자 서영보(1759~1716)는 조선 후기의 문신으로 정조․순조 때에 주로 활동하였다. 1804년 (순조 4) 홍문관부제학(弘文館副提學)이 되고 그 이듬해 예조판서에 승진하였다. 1805년 대사헌이 되고 이어 대호군(大護軍)·홍문관제학·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 등을 역임하였다. 1808년 호조판서로 있으면서 비국유사당상(備局有司堂上)을 겸직, 심상규(沈象奎)와 더불어『만기요람(萬機要覽)』을 편찬하였다. 그 뒤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평안도관찰사·규장각제학·이조판서, 대제학, 통제사, 수원부유수(水原府留守) 등을 역임하였다. 아들 기순(箕淳)도 뒤에 대제학에 올라 아버지로부터 부자손 3대가 대제학을 지내는 가통을 세웠다. 문장과 글씨에 뛰어났고 《지지대비》를 지은 사람으로도 유명하다. 시호는 문헌(文憲)이다.
두전을 쓴 홍명호(1736~1819)는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문헌상으로 홍명호의 글씨에 대한 평가는 드물지만, 이 비문의 두전은 진대(秦代) 소전(小篆)으로 된 송덕비(頌德碑)을 따른 것으로 보이며, 필획이 수려하고 결구가 긴밀하여 조선 후기 전서의 뛰어난 수준을 보여주는 수작으로 평가된다.
서자 윤사국(1728~1809)은 조선 후기의 문신이다. 글씨에 뛰어나 조정의 금보(金寶), 옥책(玉冊), 편액(扁額) 등을 많이 썼다. 필법이 지극히 묘하다고 하여 당대의 명필 윤순(尹淳)과 이광사(李匡師)가 모두 칭찬하였다. 정원용(鄭元容)의 시문집인 『경산집(經山集)』에는 윤사국의 글씨에 대해 ‘신도비에 이르기를, 공이 서예에 있어 재주가 대단히 높았으니, 그가 어렸을 때에 상국(相國) 서명균(徐命均, 1680~1745, 우의정과 좌의정을 지냈으며 명필로 이름이 높다.)이 글씨를 첩에 쓸 때, 그 절반은 빈 채로 내버려 두고 주면서 ‘자네가 스스로 쓸 때를 기다리겠다.’고 했다. 백하 윤순과 원교 이광사가 모두 글자를 써주며 열심히 공부하라고 격려했으니 뒤에 유명한 서예가가 되었다. 조정의 금옥보책(金玉寶冊)과 사찰누관(寺刹樓觀)의 편액이 공의 손에서 나온 것이 많았다. 금강산의 바위에 새인 ‘묘길상(妙吉祥)’ 세 글자는 중국 사람이 그 탑본을 보고 대자(大字) 가운데 이렇게 잘 된 것은 보기 어렵다고 감탄하였다. 여든이 넘어서 왕명을 받들어 ‘지지대지문’을 써 바쳤으니 글자 획이 살아 움직였다.’고 기록하였다. 정원용의 기록에서 보듯이 ‘지지대비’의 글씨는 윤사국이 80세에 쓴 것으로 기교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 단아한 필획과 결구를 구사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편안함을 준다. 서풍은 당시 조선에서 성행한 왕희지, 구양순, 조맹부풍이 가미된 조선풍의 글씨로 보인다.
[자료적 가치]
정조(正祖)의 부왕에 대한 지극한 사모의 정을 엿볼 수 있는 금석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서예에 능했던 윤사국의 정치(精緻)한 해서를 감상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전서로 잘 알려지지 않은 홍명호의 빼어난 소전체 두전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순조실록(純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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