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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왕후홍릉비(貞聖王后弘陵碑)

자료명 정성왕후홍릉비(貞聖王后弘陵碑) 저자 서씨(徐氏),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7-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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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용두동 산30-1)
· 작성시기 1805
· 비고 2-5277-1
180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서씨(徐氏) 1692 - 1757 조선 왕후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241.0/음기283 X 69.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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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영조(英祖)의 정비(正妃) 정성왕후(貞聖王后)의 홍릉표석(弘陵表石)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정성왕후홍릉비(貞聖王后弘陵碑)
[내용 및 특징]
영조(英祖, 1694~1776)의 원비(元妃) 정성왕후(貞聖王后, 1692~1757)의 능인 홍릉(弘陵) 앞에 세운 표석을 탁본하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음기 탁본 4점이 소장되어 있다. 이 가운데 2점은 탁본면의 가장자리를 비단으로 표구하고, 풍대(風帶)를 갖추었으며, 나머지는 종이로 표구하는 대신 탁본 상하에 비단을 덧대어 장황하였다. 1점을 제외한 나머지는 글씨에 부분적으로 가필한 흔적이 있으며, 보존상태는 전체적으로 양호하다.
『정조실록』 9년 10월 9일 기사에는 정조가 홍릉(弘陵)의 비석음기(碑石陰記)를 몸소 썼다는 내용이 있는데, 이 비문 끝에 명기된 제작일시와 일치한다. 서체는 해서이며, 정조의 어제이필임을 알 수 있다. 비문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권22에 「홍릉표석음기(弘陵表石陰記)」라는 제목으로 실려 있다.
이 표석의 서체는 정조의 단아한 해서의 어필이다. 조선 역대 국왕의 어필은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근간으로 하는 촉체(蜀體)가 대세를 이룬 반면, 정조의 어필은 촉체의 부드럽고도 유연한 획법에서 많이 이탈되었다. 이 비문의 글씨는 왕희지체(王羲之體)를 골격으로 한 진체(眞體)에 바탕을 두어 단정하면서도 주경(遒勁)한 획법을 구사하는 한편, 글자의 짜임에서 원세(圓勢)의 특징이 강한 안진경(顔眞卿)의 서풍이 가미되어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들어와 당대(唐代) 안진경체 뿐만아니라 송대(宋代)의 다양한 서풍을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던 당시 분위기가 반영된 것이라 이해된다.
음기의 내용은 정성왕후의 존호(尊號)를 나열하였으며, 탄생을 비롯하여, 가례, 세자빈 책봉, 왕비 진봉, 승하에 이르기까지의 연월을 기술하였다. 끝부분에서는 장지(葬地)와 비문을 제작한 일시가 명기되어 있다. 비문에 의하면 정성왕후의 묘소를 고양(高陽) 창릉(昌陵)의 좌강(左岡)에 조성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창릉은 조선 8대 국왕 철종(哲宗, 1441~1469)의 능으로, 현재 경기도 고양시 신도동에 위치하며 서오릉 경내에 있다.
정성왕후의 성은 서씨(徐氏)이며 존호(尊號)는 혜경장신강선공익인휘소헌(惠敬莊愼康宣恭翼仁徽昭獻), 휘호(徽號)는 단목장화(端穆章和)이다. 달성부원군 서종제(徐宗悌)의 딸로 1692년(숙종18)에 태어났다. 1704년(숙종 30) 연잉군(延仍君)과 혼인하여 달성군부인(達城郡夫人)으로 책봉되었고, 1721년(경종 1) 연잉군이 왕세제(王世弟)로 책봉됨에 따라 세제빈(世弟嬪)이 되었다. 1724년 왕세제 연잉군이 경종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르자 왕비가 되었으며 이때 영조의 나이는 31세, 정성왕후의 나이는 33세였다. 정성왕후는 당쟁으로 인해 어지러운 정국 속에서 소생까지 없었으나 후궁 영빈 이씨 소생의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매우 아꼈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갈등을 풀기 위해 노심초사하던 중 병을 얻어 창덕궁 관리각(觀理閣)에서 66세로 사망하였다. 1740년(영조 16) 혜경(惠敬)이란 존호가 올려진 뒤 장신(莊愼), 강선(康宣)이란 존호가 추상되었다. 사망한 뒤에 공익(恭翼), 인휘(仁徽)라는 존호가 추상되었다. 정조 때에 들어와 소헌(昭獻)이란 존호가 추상되었다.
정성왕후의 국상을 당하여 장생전(長生殿)에서 재궁(梓宮)의 제작과 운반 등에 관한 업무 일체를 기록한 의궤로 장서각 소장 『정성왕후국휼의궤(貞聖王后國恤儀軌)』(귀2-3008)가 있으며, 정성왕후의 국상과 관련한 종합적 의궤로 규장각 소장 『정성왕후(貞聖王后)국장도감도청의궤(國葬都監都廳儀軌)』(13589)가 있다. 또한 정성왕후의 능인 홍릉을 조성한 기록으로 『(정성왕후(貞聖王后)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13591-1,2)가 규장각에 전한다. 정성왕후의 상례에 관한 자료는 이 외에도 장서각에 소장된 『정성왕후국휼초등록(貞聖王后國恤草謄錄)』(2-3009)가 있으며, 규장각에 『(정성왕후(貞聖王后)빈전도감의궤(殯殿都監儀軌)』(13590-1)와 『(정성왕후(貞聖王后)혼전도감의궤(魂殿都監儀軌)』(13590-2)가 전한다.
[자료적 가치]
정성왕후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정조 어필 가운데 해서의 변모과정을 살필 수 있는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정성왕후국휼의궤(貞聖王后國恤儀軌)』(장서각, 귀2-3008)
『정성왕후국장도감도청의궤(貞聖王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589)
『정성왕후산릉도감의궤(貞聖王后山陵都監儀軌)』(규장각, 13591-1,2)
『정성왕후국휼초등록(貞聖王后國恤草謄錄)』(장서각, 2-3009)
『정성왕후빈전도감의궤(貞聖王后殯殿都監儀軌)』(규장각, 13590-1)
『정성왕후혼전도감의궤(貞聖王后魂殿都監儀軌)』(규장각, 13590-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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