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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왕후원릉비(貞純王后元陵碑)

자료명 정순왕후원릉비(貞純王后元陵碑) 저자 김씨(金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6-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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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 작성시기 1805
· 비고 2-5276-1, 2-5276-2
180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김씨(金氏) 1745 - 1805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18.0/음기218.3 X 전82.1/음기82.4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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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영조(英祖)의 계비(繼妃)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원릉비(元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정순왕후원릉비(貞純王后元陵碑)
[내용 및 특징]
1805년(순조 5)에 정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사망에 따라 영조의 원릉비에 부좌(祔左)하고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원릉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경내에 있다. 영릉은 왕릉과 왕비릉이 나란히 놓인 쌍릉으로, 난간석이 두 왕릉을 에워싸고 있다. 봉분을 감싸는 병풍석은 설치되지 않았으며, 각 봉분 앞에 혼유석이 1좌씩 놓여 있고, 혼유석 좌우로 받침에 꽃문양을 새긴 망주석 1쌍이 있다. 그밖에 석양(石羊)·석호(石虎) 각 2쌍, 문인석·석마(石馬) 각 1쌍, 장명등 1좌, 무인석·석마 각 1쌍 등의 석물이 배치되어 있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를 각각 나누어 장황하였다. 전면은 대자전서(大字篆書)로 썼으며, 음기는 중자해서(中字楷書)로 써서 새겼다. 현재 장서각에는 전면 4점, 음기 4점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모두 동시기에 탁본하여 표구한 것으로 보이며, 모두 풍대(風帶)가 있다. 그 중 전면 한 건은 원탁(原拓 )을 그대로 표구하였다. 일부 자료는 좀구멍이 있으며, 옥축(玉軸)이 빠지거나 비단이 탈색되는 등 보존상태가 좋지 못하다. 전면에는 ‘조선국/정순왕후부좌(朝鮮國/貞純王后祔左)’라 썼고, 음기에는 정순왕후의 탄생, 책봉, 승하의 내용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영조의 원릉 표석의 전면에는 ‘조선국/영조대왕원릉(朝鮮國/英祖大王元陵)’이라 써 동원이강(同原異岡)의 능인 경우 국왕의 표석에만 능호(陵號)를 제시하였음을 알 수 있다.
피전자 정순왕후의 본관 경주(慶州), 성은 김(金), 오흥부원군(鰲興府院君) 한구(漢耉)의 따님이다. 존호와 휘호, 시호를 모두 더한 정식 칭호는 ‘예순성철장희혜휘익렬명선수경광헌융인소숙정헌정순왕후(睿順聖哲莊僖惠徽翼烈明宣綏敬光獻隆仁昭肅靖憲貞純王后)이다. 영조의 정비 정성왕후(貞聖王后)가 사망하자 1759년(영조 35) 15세로 51세 연상인 영조와 결혼하여 왕비로 책봉되었다. 친정이 노론의 중심가문이었음에 비해 사도세자는 소론에 기울어져 노론에게 비판적이었고, 그 내외가 어머니뻘인 자기보다 10세나 연상인 데서 빚어지는 갈등 때문에 1762년 영조가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 데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고 전해진다. 오빠 김구주(金龜柱)가 이끄는 세력이 영조 말년에 사도세자의 장인인 홍봉한(洪鳳漢) 중심세력과 맞서고, 친정인물들을 중심으로 하는 벽파(僻派)가 정조대에 시파(時派)와 대립하는 데 중요한 정치적 배경이 되었다.
그녀는 순조연간에 격렬한 천주교 탄압을 일으켜 정약용(丁若鏞) 등의 남인(南人)들을 축출하고, 국왕 친위부대인 장용영(壯勇營)을 혁파하는 등 정조가 수립한 정치질서를 부정하였다. 이러한 정책들은 친정인물인 김관주(金觀柱)․김일주(金日柱)․김용주(金龍柱) 및 영의정 심환지(沈煥之) 등이 뒷받침하였다. 일반 국정에서는 민생문제의 해결을 위해 비변사․관찰사․수령으로 이어지는 통치 질서의 확립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시파 김조순(金祖淳)이 벽파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정조의 결정대로 딸을 순조의 비로 들여 국왕의 장인이 된 상황에서 1803년 12월에 수렴청정을 그치게 되자, 정세가 바뀌어 벽파가 조정에서 숙청되고 친정인물들도 대부분 도태되었다. 1805년 1월 12일 경복전(景福殿)에서 승하하였으니, 향년 61세였다. 시호(諡號)는 ‘정순(貞純)’, 휘호(徽號)는 ‘소숙정헌(昭肅靖憲)’ 전호(殿號 )는 ‘효안(孝安)’, 능호(陵號)는 ‘원릉(元陵)’이다.
본래 영조는 정비(正妃)인 정성왕후가 잠든 서오릉의 홍릉(弘陵) 자리에 묻히기를 바랐으나 정조가 현 위치에 능지를 정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했다. 원릉이 있는 자리는 원래 효종의 능인 영릉(寧陵)이 있었던 곳으로, 영릉은 1673년(현종 14) 경기도 여주로 옮겨졌다. 영조는 1776년 3월 숨을 거두고, 같은 해 7월 27일 능에 안장되었으며, 정순왕후는 원릉을 조성한 지 29년 후인 1805년(순조 5) 6월 20일 영조 옆에 안장되었다.
장서각에는 원릉비 탁본이 여러 본 소장되어 있다. 즉 1776년(정조 즉위)에 세운 원릉비의 탁본으로 전면과 음기가 각각 7점씩 남아있다. 그러나 제첨에 ‘원릉비음기(元陵碑陰記)’ 또는 ‘원릉비(元陵碑)’라 하여 장황 시가가 서로 다른 두 계열의 탁본이 있다. 한편 장서각에는 『정순왕후국휼등록(貞純王后國恤謄錄)』이 소장되어 있어 정순왕후의 장례절차를 소상하게 살필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정순왕후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9세기 초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정순왕후국휼등록(貞純王后國恤謄錄)』(장서각 2-3010~301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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