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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당구기비(讀書堂舊基碑)

자료명 독서당구기비(讀書堂舊基碑) 저자 이성계(李成桂),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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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남도 함주군 (현재주소: 함경남도 함주군 북주동면 회상리)
· 작성시기 1797
· 비고 2-5221
179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성계(李成桂) 1335 - 1408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59.0 X 107.1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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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태조(太祖)가 독서하던 독서당(讀書堂)의 옛터에 세운 사적비(事蹟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독서당구기비(讀書堂舊基碑)
[내용 및 특징]
1797년(정조 21) 정조(正祖)가 태조의 옛 독서당의 사적을 기리기 위해 직접 짓고 써 세운 어제․어필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함흥(咸興) 동쪽으로 15리 쯤에 귀주(歸州)가 있고, 그곳에 설봉산(雪峰山)이 있다. 태조는 물가의 반석에 초당을 짓고 독서하였다. 이곳이 독서당이다. 태조 이후 21대 국왕인 정조가 1797년 10월에 직접 짓고 써서 비석을 세우고 ‘독서당구기(讀書堂舊基)’라 하였다. 본래 독서당에 있던 비석을 1716년(숙종 42) 다시 세웠고, 정조가 중수하면서 또다시 세운 것이다. 비석의 소재지는 경흥 귀주동 설봉산(현 함경남도 함흥 북주 동면 회상리)이다.
족자는 전면과 음기를 함께 장황하였다. 오른편에는 전면인 ‘독서당구기(讀書堂舊基)’가 대자해서로 씌여 있고, 왼편에는 음기에 해당하는 비명(碑銘)과 관지(款識)가 있다. 음기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옛날 우리 성조께서 나라를 일으키고자 북방에 계실 때 날마다 설봉의 서당에서 책을 읽으셨다. 드디어 우리 자자손손 만년 유왕(維王)의 터를 닦으셨다. 이에 큰 돌을 세워 글을 새겨서 대열을 찬양하고 밝은 빛을 보게 한다. 함흥부 동쪽 15리에 동리가 있는데 귀주(歸州 )라 한다. 산이 있어 이를 설봉(雪峰)이라 하니, 이곳이 곧 우리 왕실의 선조가 탄생하신 창업의 발상지가 되는 고향이다. 성조께서 일찍이 간수가의 반석 위에 초당을 짓고, 그 속에서 글을 읽으시며, 또 용흥(龍興)에 경흥전(慶興殿)을 세우셨는데, 전(殿)과 당(堂)과의 거리는 3리의 가까운 거리이다.”
정조가 쓴 음기 가운데 ‘설봉산이 우리 왕실의 선조가 탄생하신 창업의 발상지가 되는 고향’이라는 언급이 주목된다. 이곳은 석왕사라는 절이 있는데, 태조가 조선을 개창하여 등극하기 전에 꾼 꿈을 무학대사가 왕이 될 징조라고 풀이하였다 하여 유명해진 사찰이다. 1377년에 이성계를 필두로 고려의 대신들이 함경남도 길주 광적사에 있던 대장경과 불기를 모셔와 석왕사에 안치한 일을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한 뒤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숙종이 1708년(숙종 34) 태조가 158자의 내력을 쓴 사실을 비에 새겨 세우도록 한 《석왕사사적비(釋王寺事蹟碑)》가 전한다. 이후 영조가 1758년에 다시 태조와 숙종의 글에 대해 관련 사실을 기록한 것을 남기기도 하였다. 또한 장서각에 소장된 《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는 1790년(정조 14) 정조가 직접 짓고 써서 석왕사에 세운 비석이다. 석왕사의 내력과 조선왕실의 연관성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한국사찰전서』 석왕사 항목에 세 가지 자료가 나란히 실려 있어 참고가 된다.
정조는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서화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던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재위 기간 내내 서화 분야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문예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화 분야에 대한 정조의 지대한 관심이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통치이념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명서가로서 그 이름을 전하고 있고, 당시에 순정한 고문(古文)을 회복하려고 문체반정을 제기한 것처럼 글씨에서도 유교적인 충신상을 보여주는 안진경의 글씨와 같은 순후하고 둔중하며, 근골이 강한 글씨를 장려하고, 유미한 글씨를 배격하는 서체반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적극적으로 기백이 넘치고 정연한 글씨의 풍으로 바꾸고자 시도하였고, 자신도 그런 서풍을 추고하였음을 이 비문의 글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글씨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졌고, 스스로도 서풍을 일신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서예가 기교와 미적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예술적인 추구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학문과 성품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이자 세도(世道)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글씨를 ‘심획(心劃)’이라 불렀고, 스스로 기교 있고 미적인 글씨 대신 돈실(敦實)하고 원후(圓厚)한 글씨를 추구하였다. 또한 안진경, 유공권 등 중국 서예가와 안평대군, 한호 등 한국의 서가를 이에 합당한 글씨를 쓴 작가들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 비의 서체는 왕희지체를 수용한 흔적이 보이며, 안진경의 획질(劃質)에서 보이는 돈후한 미감을 구사하고 있어 정조의 빼어난 해서로 평가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숙종 때에 건립된 《태조대왕독서당중건사적비》와 함께 조선 후기 왕실 추숭사업의 일단을 엿볼 수 있는 금석문이다. 또한 당시 보기 드문 빼어난 해서체로 쓰인 정조의 어제․어필비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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