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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

자료명 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 저자 석왕사(釋王寺),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49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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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함경도 (현재주소: 함경남도 안변 설봉산)
· 작성시기 1790
· 비고 2-5349
179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석왕사(釋王寺)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305.4 X 12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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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석왕사(釋王寺)와 조선왕실의 연관성과 그 내력을 기록한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
[내용 및 특징]
1790년(정조 14) 함경남도 안변에 있는 석왕사(釋王寺)의 내력과 조선왕실의 연관성을 기록하여 세운 비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석왕사는 조선 태조가 조선을 개창하여 등극하기 전에 꾼 꿈을 무학대사가 왕이 될 징조라고 풀이하였다 하여 유명해진 사찰이다. 1377년에 이성계를 필두로 고려의 대신들이 함경남도 길주 광적사에 있던 대장경과 불기를 모셔와 석왕사에 안치한 일을 이성계가 태조로 즉위한 뒤 목판에 새겨 보존하도록 하였다. 이에 대해 숙종이 1708년(숙종 34) 태조가 158자의 내력을 쓴 사실을 비에 새겨 세우도록 한 《석왕사사적비(釋王寺事蹟碑)》가 전한다. 이후 영조가 1758년에 다시 태조와 숙종의 글에 대해 관련 사실을 기록한 것을 남기기도 하였다. 《안변설봉산석왕사비(安邊雪峯山釋王寺碑)》는 1790년(정조 14) 정조가 직접 짓고 써서 석왕사에 세운 비석이다. 『한국사찰전서』 석왕사 항목에 세 가지 자료가 나란히 실려 있어 참고가 된다.
이 비석은 정조의 어제․어필비이다. 비문에는 건립 연대가 ‘여소자즉조십사년추구월 일 경찬서(予小子卽祚十四年秋九月 日 敬撰書)’라 되어 있다. 본문 가운데 ‘법상지가김시우인목인원후체아자전궁전후범삼술갑야(法相之加金始于仁穆仁元后逮我慈殿宮前後凡三戌甲也)’라 한 구절로 보아 비문의 건립 시기는 정조 14년(1790)이 분명하다. 인원왕후는 숙종의 계비이며, ‘아자전’은 사도세자비인 혜경궁 홍씨를 가리킨다.
비문의 내용은 태조(太祖)가 이른바 ‘흥왕지징(興王之徵)’의 꿈을 꾸고 무학대사에게 점석(占釋)한 뒤 그의 토굴 구지(舊址)에 사찰을 세웠다는 이야기와, 사찰 안에 태조가 직접 심은 소나무와 배나무 등이 있다는 이야기, 숙종과 영조 두 임금이 친히 제작하게 한 석비가 두 개 있다는 이야기, 그리고 인목대비(仁穆大妃) 이하 역대의 왕후들이 이 사찰을 받들어 오던 중 이번에 원자(元子)를 탄생하게 되어 매우 경하스러운 일이라는 이야기 등이 적혀 있다. 그러나 이 비문의 전체적인 핵심은 무엇보다도 가장 많은 분량이 담겨 있는 원자 탄생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통해 일반 사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적비라기보다 석왕사와 조선왕실과의 친밀했던 관계 및 정조 개인의 신심(信心)을 담은 비석으로 이해된다. 또한 정조의 불(佛)․유(儒)․선(仙)에 대한 폭넓은 식견이 구사되어 있다.
비문에 보이는 정조의 원자는 문효세자로 정조와 의빈성씨와의 사이에서 얻은 아들이다. 휘는 순(㬀), 시호는 문효(文孝)이며 순조의 이복형이다. 1782년 10월 13일(음력 9월 7일) 새벽에 정조의 장남으로 태어나 그가 두 살 때 바로 왕세자로 책봉했다. 1786년 6월 6일(음력 5월 11일) 미시(未時)에 5세의 나이에 홍역으로 창덕궁의 별당에서 사망하였다. 사후 문효세자로 추증되었고 대한제국 수립 후 태자로 추증되었다.
장서각에 소장된 탁본 《문효세자효창묘신도비명(文孝世子孝昌墓神道碑銘)》의 서(序)에서 정조는 문효세자의 죽음을 두고 ‘지극한 애통함을 글로 다 적을 수 없다’는 심정을 토로하며 효장세자의 기질과 성품 등을 적어나갔다. 정조의 글에 의하면 세자는 백일이 안 되어서 병풍 속의 글자를 분별하였으며, 자라면서 기완(器玩)에 대해서는 좋아함이 없고 오직 서책을 좋아하였다고 하고, 『천자문』을 주고 빈료(賓僚)를 두었지만 개강(開講)을 허락하지 않았음은 너무 일찍 깨닫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자가 병고를 겪을 때의 상황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창경궁의 별당에서 병으로 누워있을 때 불을 좌우에 밝혀 두고 잠을 자는데 세자가 부르는 소리를 주위사람들은 잠자느라 알지 못하였지만 정조는 알고서 등불을 얻어서 급히 가서 구완하였다고 하였다. 또 정조는 오직 세자의 병에 대한 근심으로 뒤척이고, 약을 구할 수 없어 차마 그 사별하여야 함에 이르러서는 부모가 된 것을 부끄러워하는 등 안타깝고 비통한 심정을 절절히 묘사하였다.
정조는 개혁군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서화 분야에 특출한 재능을 발휘했던 예술가였을 뿐만 아니라 재위 기간 내내 서화 분야에 깊은 관심을 표명했던 문예군주이기도 하다. 그러나 서화 분야에 대한 정조의 지대한 관심이 심미적이고 예술적인 차원이 아니라 통치이념의 구현이라는 차원에서 비롯되었다. 정조는 명서가로서 그 이름을 전하고 있고, 당시에 순정한 고문(古文)을 회복하려고 문체반정을 제기한 것처럼 글씨에서도 유교적인 충신상을 보여주는 안진경의 글씨와 같은 순후하고 둔중하며, 근골이 강한 글씨를 장려하고, 유미한 글씨를 배격하는 서체반정 정책을 시행하였다. 정조는 적극적으로 기백이 넘치고 정연한 글씨의 풍으로 바꾸고자 시도하였고, 자신도 그런 서풍을 추고하였음을 이 비문의 글씨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정조는 재위기간 내내 글씨에 상당히 큰 관심을 가졌고, 스스로도 서풍을 일신시키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정조는 서예가 기교와 미적 아름다움에 바탕을 둔 예술적인 추구의 대상이 아닌, 한 사람의 학문과 성품을 읽을 수 있는 하나의 매개체이자 세도(世道)의 성패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라고 주장하였다. 그는 글씨를 ‘심획(心劃)’이라 불렀고, 스스로 기교 있고 미적인 글씨 대신 돈실(敦實)하고 원후(圓厚)한 글씨를 추구하였다. 또한 안진경, 유공권 등 중국 서예가와 안평대군, 한호 등 한국의 서가를 이에 합당한 글씨를 쓴 작가들로 높이 평가하였다. 이 비의 서체는 왕희지체를 수용한 흔적이 보이며, 안진경의 획질(劃質)에서 보이는 돈후한 미감을 구사하고 있어 정조의 빼어난 행서로 평가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왕실의 기복사찰로서 석왕사의 성격과 정조 개인의 불교관을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당시 보기 드문 빼어난 행서체로 쓰인 정조의 어제․어필비라는 점에서도 가치가 있다.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정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한국사찰전서(韓國寺刹全書)』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한국역대서화가사전』 국립문화재연구소, 2011.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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