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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장헌세자현륭원비(思悼莊獻世子顯隆園碑)

자료명 사도장헌세자현륭원비(思悼莊獻世子顯隆園碑) 저자 이선(李愃), 이산(李祘), 조윤형(曺允亨),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7-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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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화성시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작성시기 1789
· 비고 2-5287-1, 2-5287-2
178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선(李愃) 1735 - 1762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조윤형(曺允亨) 1725 - 1799 조선 문신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217.0 X 74.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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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현륭원(顯隆園)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사도장헌세자현륭원비(思悼莊獻世子顯隆園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의 차남이자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祖)의 현륭원(顯隆園)에 세운 표석을 종이에 떠내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이 금석문의 건립연대는 1789년(정조 13)으로 천봉(遷奉)․개호(改號)하면서 건립한 것이다. 음기는 조선 후기 서예로 유명했던 조윤형(趙允亨)이 썼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현륭원비 탁본은 전면과 음기가 각 3점씩 총 6점의 족자가 남아 있다. 모두 탁면에 오금은 먹였으며,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고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청색 비단으로 만들었다. 천리는 미색 비단으로 만든 두 개의 풍대(風帶)를 붙였고, 축두(軸頭)는 옥으로 끼웠다.
전면에는 전서체로 ‘조선국/사도장헌세자/현륭원(朝鮮國/思悼莊獻世子/顯隆園)’이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사도세자의 탄생, 왕세자 책봉, 대리청정 및 훙서 시기, 향년, 시호, 장례시기와 장지를 기재하고, 다음으로 시호, 존호의 추상과 가상, 원소의 천봉 등을 시기순으로 기재하였다. 비석의 건립연대는 기재되지 않았으나 비문의 내용과 『정조실록』의 기사를 참조하면 1789년(정조 13)임을 알 수 있다.
사도세자의 추숭과 개호에 따른 능의 변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사제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자 영조는 양주(楊州)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峯山,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이후 정조 즉위년(1776)에 수은묘를 원(園)으로 승격시켜 이름은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후 정조 13년(1789)에 현재의 위치로 천봉하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이후 선조 16년(1816) 혜빈홍씨(惠嬪洪氏)가 승하하자 동원(同原)에 합봉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융릉은 현재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으며,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도세자의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이다. 자(字)는 윤관(允寬)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시호는 사도(思悼)ㆍ장헌(莊獻)으로 시호인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映嬪 李氏)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비로 맞이해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정(李琔),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이산(李祘), 청연군주(淸衍君主), 청선군주(淸璿君主)를 낳았으며, 궁인 출신의 양제임씨(良娣林氏)와 수칙박씨(守則 朴氏)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청근현주(淸瑾縣主)를 낳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맏아들인 경의군(敬義君) 이행(李緈)을 세자로 삼았으나 그는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735년 음력 1월 21일에 후궁인 영빈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낳았다.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가 되어 원자(元子)의 칭호와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영조실록』과 『한중록(閑中錄)』 등에는 그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1761년에 은신군 이진과 수칙박씨를 때려서 죽인 것, 여승(女僧) 출신의 가선(假仙)이라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궁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액속(掖屬)의 무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전 상인들의 물품을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액속들이 위세를 빌어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 등이 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음력 5월 24일에 직접 흥화문(興化門)으로 나아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장조가 거두어들인 빚을 갚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음력 윤5월 13일(7월 4일)에는 장조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령했다. 사도세자는 자결하려 했으나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고변한 내용을 전하며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다음날에는 사도세자를 시위하던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을 참수했다. 뒤주에 갇힌 장조는 8일째인 음력 윤5월 21일(7월 12일)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이 금석문과 관련하여 장서각 소장 『현륭원등록(顯隆園謄錄)』(2-2381)은 현륭원과 원소 주변에 대해 원소도감과 수원부(水原府)에서 진행한 각종 사업을 1794년(정조 18)부터 1797년(정조 21)까지 기록한 등록이다. 또한 『현륭원등록(顯隆園謄錄)』(2-2382)은 1857년(철종 8)부터 1862년(철종 13)까지 현륭원의 출입문서를 수록한 등록으로, 19세기 중연 현륭원의 관리 실태를 보여준다.
이 금석문과 같은 비석의 탁본은 장서각에 『현륭원비(顯隆園碑)』가 첩장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현륭원 관련 비지문(碑誌文)으로 1816년(순조 15)에 김조순이 찬술한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2-4011) 등이 있다.
[자료적 가치]
사도세자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도세자 사후 각종 추숭으로 인한 호칭의 변화와 능제의 변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莊祖]永祐園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624~13626)
『[莊祖]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27~13630)
『[莊祖]顯隆園遷園儀軌』(규장각 13629)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3)
『顯隆園誌文』(장서각 2-4010)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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