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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모궁태실비(景慕宮胎室碑)

자료명 경모궁태실비(景慕宮胎室碑) 저자 이선(李愃),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90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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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상남도 예천군 (현재주소: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 작성시기 1785
· 비고 2-5290
178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선(李愃) 1735 - 1762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태실비(胎室碑)
· 크기(cm) 183.5 X 66.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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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태실 앞에 세운 태실비(胎室碑)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경모궁태실비(景慕宮胎室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의 차남이자 22대 정조의 아버지인 사도세자(思悼世子, 莊祖)의 태실 앞에 세운 표석을 종이에 떠내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이 금석문의 건립연대는 정조 1785년(정조 9)으로 경상북도 예천군 상리면 명봉리 명봉사 뒷산에 세워졌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가 하나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오른편에는 표석의 앞면을, 왼편에는 후면이다. 전면은 ‘경모궁태실(景慕宮胎室)’이 대자해서로 씌여 있고, 뒷면에는 ‘乾隆五十年乙巳三月初八日建’라는 글자가 중자해서로 씌였다.
태실은 왕실자손의 태를 봉안하는 곳이다. 태실 주위에는 흔히 난간을 두르고 앞에 표석을 세웠으며, 금표(禁表)를 세워 채석, 벌목, 개간, 방목 등의 행위를 금지하였다. 만약 이 금령을 어기고 채석이나 벌목을 하였을 경우에는 국법에 따라 엄벌에 처했다. 조선 초기에는 태신 주변의 전답과 집을 모두 철거하기도 할 정도로 태실에 대한 규정이 엄격하였다. 세종 때에는 태실 근처에 무덤이 있다는 사실을 보고하지 않았다가 관련자들이 여러 형태로 처벌되기도 하였고, 중종 때에는 영천에 있는 세자의 태실에 불이 난 적이 있는데, 이 때문에 산지기는 곤장 100대를 맞고 수령은 규찰하지 못한 죄로 곤장 70대를 맞고 체직되기도 하였다.
사도세자는 1월에 태어났으나 그의 태는 석 달 뒤인 4월에 묻혔다.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뒤 아들 정조가 1785년(정조 9년)에 경모궁의 태실비를 비롯한 여타 석물을 가봉하였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30년, 일제는 우리나라 전역의 태실을 발굴하고 태가 든 태 항아리를 서삼릉으로 옮겨 통합 관리하였다. 경모궁 태실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사도세자의 태실에는 태실비 조차 사라지고 없었다. 조선이 국권을 상실하자 이씨 왕조도 존재할 수 없는 처지가 되었다. 더군다나 태실이 이관된 상황이었으니 경모궁 태실은 자연스럽게 세간의 관심 밖으로부터 멀어지고 방치되면서 주변의 산과 다름없이 변모해 버린 것이다. 인적이 드문 심산유곡에 내버려진 태실비를 어느 날 명봉사 관계자들이 좋은 석질을 아껴 재활용하게 된다. 1940년 태실 남쪽 200여 미터 아래에 위치한 명봉사로 옮겨진 태실비는 명봉사 사적비로 탈바꿈하게 된 것이다. 명봉사 무량수전 옆에는 오래된 비석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하나는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187호인 문종대왕 태실비이고 나머지 하나가 명봉사 사적비이다.
사도세자의 시호는 사도(思悼)ㆍ장헌(莊獻)으로 시호인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映嬪 李氏)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비로 맞이해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정(李琔),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이산(李祘), 청연군주(淸衍君主), 청선군주(淸璿君主)를 낳았으며, 궁인 출신의 양제임씨(良娣林氏)와 수칙박씨(守則 朴氏)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청근현주(淸瑾縣主)를 낳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맏아들인 경의군(敬義君) 이행(李緈)을 세자로 삼았으나 그는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735년 음력 1월 21일에 후궁인 영빈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낳았다.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가 되어 원자(元子)의 칭호와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영조실록』과 『한중록(閑中錄)』 등에는 그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1761년에 은신군 이진과 수칙박씨를 때려서 죽인 것, 여승(女僧) 출신의 가선(假仙)이라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궁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액속(掖屬)의 무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전 상인들의 물품을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액속들이 위세를 빌어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 등이 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음력 5월 24일에 직접 흥화문(興化門)으로 나아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장조가 거두어들인 빚을 갚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음력 윤5월 13일(7월 4일)에는 장조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령했다. 사도세자는 자결하려 했으나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고변한 내용을 전하며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다음날에는 사도세자를 시위하던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을 참수했다. 뒤주에 갇힌 장조는 8일째인 음력 윤5월 21일(7월 12일)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다.
사도세자의 추숭과 개호에 따른 능의 변화를 살피면 다음과 같다. 1762년(영조 38)에 사도사제가 뒤주에 갇혀 사망하자 영조는 양주(楊州) 중량포(中梁浦) 배봉산(拜峯山, 현재의 동대문구 휘경동)에 장사지내고 묘호를 수은묘(垂恩墓)라 하였다. 이후 정조 즉위년(1776)에 수은묘를 원(園)으로 승격시켜 이름은 영우원(永祐園)이라 하였다. 이후 정조 13년(1789)에 현재의 위치로 천봉하고 원호를 현륭원으로 바꾸었다. 이후 선조 16년(1816) 혜빈홍씨(惠嬪洪氏)가 승하하자 동원(同原)에 합봉하였다. 1899년(광무 3)에는 현륭원을 융릉(隆陵)으로 격상시켰다. 융릉은 현재 경기도 화성시 태안읍 안녕리에 있으며, 사적 제 206호로 지정되어 있다.
사도세자와 관련한 비석의 탁본은 장서각에 『현륭원비(顯隆園碑)』가 첩장본으로 소장되어 있다. 이밖에 현륭원 관련 비지문(碑誌文)으로 1816년(순조 15)에 김조순이 찬술한 『현륭원지문(顯隆園誌文)』(2-4011) 등이 있다.
[자료적 가치]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도세자 사후 각종 추숭으로 인한 호칭의 변화와 능제의 변모까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莊祖]永祐園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624~13626)
『[莊祖]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27~13630)
『[莊祖]顯隆園遷園儀軌』(규장각 13629)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3)
『顯隆園誌文』(장서각 2-4010)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뒤늦게 얻은 자식의 무병장수 염원 담았던 사도세자 태실의 수난」 김정식 『대구일보』, 2012. 12. 1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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