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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종대왕영릉비(眞宗大王永陵碑)

자료명 진종대왕영릉비(眞宗大王永陵碑) 저자 이행(李緈), 이산(李祘),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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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작성시기 1785
· 비고 2-5282-1, 2-5282-2
1785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행(李緈) 1719 - 1728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전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廟碑)
· 크기(cm) 전210.5/음기210.5 X 전77.0/음기77.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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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효장세자(孝章世子)와 효순현빈(孝純賢嬪)의 추숭비(追崇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진종대왕영릉비(眞宗大王永陵碑)
[내용 및 특징]
1785년(정조 9)에 영조(英祖)의 장자 효장세자를 진종(眞宗)으로 추존하는 동시에 효장세자빈 효순현빈을 효순왕후(孝純王后)로 함께 추존하면서, 효장세자묘를 영릉(英陵)으로 격상한 뒤에 세운 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한한 금석문이다. 효장세자의 묘는 1776년(정조 즉위) 영릉으로 추존되었으나, 표석은 9년이 지난 1785년에 세워졌다. 비문은 정조가 직접 짓고 썼다.
탁본은 마멸된 흔적이 없이 자획이 선명하며, 먹을 입힌 상태도 양호한 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 진종대왕영릉(朝鮮國 眞宗大王永陵’, ‘효순왕후부좌(孝純王后祔左)’를 3행에 걸쳐 소전체(小篆體)로 새겼고, 음기는 8행의 내용을 해서체로 새겼다. 현재 장서각에는 족자로 장황한 영릉비 전면 2점과 음기 3점이 소장되어 있다.
족자의 장황은 현존하는 2점의 전면과 3점의 음기 모두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문양이 없는 백록색 비단을 댔으며,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비단을 둘렀다. 천리에는 좌우를 등간격으로 하여 미색비단으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고, 좌우에 옥축(玉軸)을 달았다.
음기의 내용에는 효장세자의 탄생, 경의군(敬義君) 책봉, 승하 및 증시(贈諡)된 해의 간지와 월일 및 장지를 기록하였고, 정조가 후사(後嗣)된 시기도 적었다. 효순왕후 조씨에 대해서도 탄생, 세자빈 책봉, 사호(賜號), 승하 및 증시와 추존한 해의 간지 및 월일을 기록하였다. 비문의 마지막 행에는 ‘小子卽祚之九年乙巳 月 日 謹書並篆’이라 하여 음기의 내용은 물론 전면의 전서 또한 정조의 어필임을 밝혔다. 이와 관련하여 『정조실록』 9년 11월 6일에는 영릉에 어제어필비(御製御筆碑)를 세우고 감동당상(監董堂上)과 관련자들을 시상했다는 기사가 확인된다.
정조가 쓴 음기의 서체는 근엄단정(謹嚴端整)한 석봉체(石峯體)에 안진경체(顔眞卿體)의 장중미(莊重美)가 곁들여진 것으로 파악되며, 정조가 장중하고 웅건한 양송체(兩宋體)를 따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정조의 서체는 ‘글씨는 돈실원후(惇實圓厚: 꽉차고 둘글며 두툼함)하고 졸박무교(拙樸無巧: 서툰 듯 순박하고 꾸밈없음)해야 한다는 자신의 서예관과도 잘 부합된다.
효장세자의 자는 성경(聖敬), 이름은 행(緈), 시호는 효장(孝章)이다. 영조의 맏아들로 비(妃)는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에 사망하여 이복동생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왕세자가 되었다.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사가(私家)의 분묘보다 후한 양식으로 장례할 것을 명하였고, 장례의 절차는 묘소도감과 예장도감에서 주관하였다. 1729년(영조 5) 1월 26일에 장례를 마치고 묘호(墓號)를 효장묘(孝章墓)라 하였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조리읍 봉일천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순현빈 조씨는 본관이 풍양(豊壤)이며, 조부는 도사를 지낸 증영의정(贈領議政) 풍흥부원군(豊興府院君) 조인수(趙仁壽)이며, 아버지는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녹훈된 바 있고 좌의정을 지낸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이다. 현빈조씨는 1715년(숙종 41) 12월 14일 동부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증참판(贈參判) 이상백(李相佰)의 딸이다. 1727년(영조 3)에 13세의 나이로 효장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가례 다음해에 효장세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751년(영조 27)까지 37세의 생의 살다가 효장세자의 기일 하루 전인 11월 14일 창덕궁 의춘헌에서 사망하였다. 1752년(영조 28) 정월 11일 효순(孝純)의 시호를 받았고, 같은 달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 을좌(乙坐)에 부장되었다.
정조가 효장세자의 묘를 영릉으로 추존하여 격상시킨 데에는 효장세자를 어린 나이에 잃었던 영조의 각별한 애정과 당부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효장세자에게 양자로 입적하였던 정조 자신이 가진 깊은 추모의 마음이 그 배경이 되었다. 영조는 일찍이 정조를 왕세손으로 책봉할 때, 효장세자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그리고 왕세손 정조에게 훗날 효장세자를 추존할 것을 유지를 써서 당부하였다. 따라서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뜻에 따라 효장세자를 진종대왕으로 추존한 것이다.
1785년(정조 9)에는 추존된 영릉에 표석을 세웠다. 영릉은 현재 경기도 파주시 삼릉로 89에 위치해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었다. 영릉의 형태는 왕릉과 비릉을 쌍릉으로 두어 각 석상만을 앞에 두고 장명등은 그 중간에 배치하였고, 석양(石羊), 석호(石虎) 각 2필로 능 주위를 위호하게 하였다. 당초 효장세자의 장례 때에 영조가 정자각은 옛 제도로 지을 것과 석물의 조성은 사가의 석물에 비하여 좀 풍후(豊厚)할 정도로 할 것으로 명한 적이 있다.
현재 장서각에는 효장세자와 관련한 금석문으로 『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2-5280), 『효장세자묘합봉비(孝章世子墓合封碑)』(2-5281), 『진종소황제영릉추숭비(眞宗昭皇帝永陵追崇碑)』(2-5283) 등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영조와 정조연간 효장세자를 둘러싼 왕실의 정서와 질서, 영조의 유지와 이를 실행한 정조의 행동, 효장세자에 대한 정조의 입장 등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장년기 정조의 해서서풍을 확인할 수 있고, 전면의 대자는 전서로서 남은 정조의 몇 안되는 중요한 서체로 평가된다. 18세기 후반 왕실의 금석문 제작방식과 탁본, 장황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정조실록(正祖實錄)』
『弘齋全書』 문화재관리국장서각, 1978
『眞宗追崇都監儀軌』(규장각 13327)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 일한인쇄소인쇄, 1919.
『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규장각 14874)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647)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장서각, 2-5280)
『효장세자묘합봉비(孝章世子墓合封碑)』(장서각, 2-5281)
『진종소황제영릉추숭비(眞宗昭皇帝永陵追崇碑)』(장서각, 2-5283)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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