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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숙원빈인명원비(仁淑元嬪仁明園碑)

자료명 인숙원빈인명원비(仁淑元嬪仁明園碑) 저자 홍씨(洪氏), 미상, 이산(李祘),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舊210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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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 작성시기 1779
· 비고 舊2108
1779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홍씨(洪氏) 1766 - 1779 조선 후궁(後宮)
찬자 미상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16.5/음기512.8 X 전78.2/음기74.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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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정조(正祖)의 후궁 원빈(元嬪) 홍씨(洪氏)의 묘비(墓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숙원빈인명원비(仁淑元嬪仁明園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2대 국왕 정조(正祖, 1752~1800)의 후궁 원빈 홍씨(1766~1779)의 능인 원명원(元明園)에 세운 묘비를 탁본하여 장황한 금석문이다. ‘조선국인숙원빈인명원(朝鮮國仁淑元嬪仁明園)’이라 쓴 전면과 원빈 홍씨의 생애를 간략히 서술한 음기를 따로 분리하여 2개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현재 장서각에는 전면과 음기가 각 2점씩 소장되어 있다. 전면 가운데 1점은 사양(四鑲)에 하늘색 비단을 대었고, 풍대(風帶)가 있으며, 나머지 1점은 미색 민무늬 종이로 장황하였고, 풍대가 없다. 두 점 모두 탁면 오른쪽 상단에 전서로 ‘어필(御筆)’이라 씌여 있다. 음기 가운데 1점은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구름문양이 있는 종이로 표구하였으며, 나머지 1점은 미색 민무늬 종이로 장황하였다. 축두(軸頭)는 전면 1점이 옥축(玉軸)이며, 나머지는 목축(木軸)이다. 옥축을 사용한 1점은 축의 좌측 가장자리가 약간 손상되어 떨어져 나갔다. 4점 모두 보존 상태는 양호하나, 음기 1점은 축 오른쪽과 지리 오른쪽에 1㎝ 정도의 좀이 있다. 서체는 전면과 음기 모두 해서로 씌였으며, 정조의 어필이다.
비문의 음기는 원빈 홍씨의 탄생일시를 비롯하여 후궁 간택, 원빈 책봉과 사망 일시가 차례로 기술되어 있다. 마지막에는 장지와 비석을 세운 연원을 적었다. 정조의 첫 번째 후궁인 원빈 홍씨는 풍산(豊山) 본관이다. 호조참의 홍낙춘(洪樂春)의 딸이자 당시 막강한 권력자였던 홍국영(洪國榮)의 누이동생이기도 하다. 정조의 비인 효의왕후(孝懿王后)가 아이를 낳지 못하자 왕실의 후사를 위해 1778년(정조 2) 후궁으로 간택되어 입궁하였으며 숙창궁(淑昌宮)이란 궁호를 얻었다. 입궁 후 이듬해인 1779년에 갑자기 사망하자 홍국영은 원빈 홍씨의 죽음이 효의왕후의 독살 탓이라고 믿어 이후 효의왕후와 반목하게 되었다. 홍씨가 사망하자 정조는 5일 동안 조시(朝市)를 정지하였으며, 당(唐)의 비빈의 예에 의거하여 시호를 인숙(仁淑), 궁호를 효휘(孝徽), 원호(園號)를 인명(仁明)으로 정하고, 그 해 7월 3일 동부(東部) 온수동(溫水洞)에 장사지냈다. 원빈 홍씨의 비문 제작과 관련한 기사가 『정조실록』의 원빈 홍씨 졸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이휘지(李徽之 )가 표문(表文)을 짓고, 황경원(黃景源)이 지장(誌狀)을 짓고, 송덕상(宋德相)이 지명(誌銘)을 지었음을 알 수 있다.
주목할 만한 점은 원빈 홍씨의 묘소에 ‘인명원’이란 원호가 부여되었다는 점이다. 후궁의 산호에 ‘원(園)’이라는 호칭을 붙인 것은 이전의 예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이는 당시 원빈 홍씨의 오라비 홍국영이 정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아 정국을 주도하던 때이므로, 장례절차에 있어 참람한 예를 원용한 경우가 많았던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이 문제로 인해 1786년(정조 10) 인명원의 호칭을 고치자는 논의가 여러 차례 제기되어 정조의 윤허를 받아내기에 이르렀다.
이 탁본 음기의 마지막 부분에 장지와 입비 연월이 기록되어 있다. 묘비의 건립연대는 1779년(정조 3)이며, 묘소, 즉 원명원이 조성된 곳은 동부 온수동이다. 이곳은 성북구 안암동 산 1번지에 해당하는 곳으로, 본래의 원빈 홍씨의 묘역이 조성된 곳인데,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역대 왕실에 대한 의례를 담당하던 이왕직이 서울과 경기 일원에 상재한 후궁, 왕자, 공주 등의 분묘를 집장, 관리함에 따라 현재 고양시 서삼릉 영내로 옮겨졌다.
이밖에 원빈 홍씨의 생애를 살필 수 있는 기록으로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장서각 K2-664)이 전한다. 원빈 홍씨의 모부인(母夫人) 우봉이씨(牛峯李氏)의 태몽으로부터 시작하여, 원빈의 생활상과 덕행이 자세히 실려 있다. 장례 절차를 살필 수 있는 기록으로 『인숙원빈궁예장의궤(仁淑元嬪宮禮葬儀軌)』(장서각 K2-2998)가 도움이 된다. 이 의궤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도감을 설치한 기록으로 시작하여 재실(梓室)의 제작, 원소(園所)의 각 공역에 대한 세부사항이 실려 있고, 발인을 거쳐 현실을 내리기까지의 모든 장례절차가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금석문의 전면과 음기는 정조의 어필로, 이전의 여러 국왕의 어필에서 보이던 촉체(蜀體, 조맹부체)의 영향이 현저히 감소되고, 진체(眞體, 왕희지체)에 바탕을 두고 안진경(顔眞卿)의 획법을 가미한 정조만의 서체적 특징이 잘 드러난다. 이 비는 원빈 홍씨의 생애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정조의 어필 가운데 해서의 변모과정을 살피는데도 유용한 자료이다.
[자료적 가치]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다. 또한 정조 재위 초기 그의 해서 어필을 감상할 수 있는 자료로서도 가치가 있다.

참고문헌

『정조실록(正祖實錄)』
『어제인숙원빈행장(御製仁淑元嬪行狀)』(장서각 K2-664)
『인숙원빈궁예장의궤(仁淑元嬪宮禮葬儀軌)』(장서각 K2-2998)
『藏書閣所藏儀軌解題』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2.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Ⅳ-朝鮮王室 正祖~高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6.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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