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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종대왕원릉비(英宗大王元陵碑)

자료명 영종대왕원릉비(英宗大王元陵碑) 저자 이금(李昑), 이산(李祘),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4-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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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8-2)
· 작성시기 1776
· 비고 2-5274-1, 2-5274-2
177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11.8/음기208.8 X 전81.3/음기80.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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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영조(英祖)의 원릉비(元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영종대왕원릉비(英宗大王元陵碑)
[내용 및 특징]
1776년(정조 즉위), 조선 제 21대 국왕 영조의 원릉비(元陵碑)를 세우고 이를 탁본하여 장황한 금석문이다. 원 비는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의 원릉에 세운 것이다. 탁본은 전면과 음기로 나누어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전면은 전서로 ‘조선국영종대왕원릉(朝鮮國英宗大王元陵)’이라 새겼고, 음기에는 영조의 탄생, 책봉, 승하 등의 간략한 이력을 해서로 써서 새겼다. 음기의 찬자는 정조이다. 현재 장서각에는 7종의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모두 동일시기에 탁본하였으나 표구는 시기를 달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영조는 조선 제 19대 임금인 숙종과 어보니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 사이에 태어났다. 비(妃)는 서종제(徐宗悌)의 따님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耈)의 따님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이름은 금(昑)이며, 자는 광숙(光叔)이다.
영조는 1699년(숙종 25) 연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경종이 숙종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으나, 후사가 없고 건강이 좋지 못하자 노론의 이정소는 임금에게 후계자를 먼저 정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어 노론 4대신인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영중추부사 이이명이 숙종의 제2계비 인원왕후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노론은 효종(孝宗), 현종(顯宗), 숙종(肅宗)의 3대를 이은 혈종[三宗血脈)은 임금인 경종을 제외하고 왕제(王弟)인 연잉군 밖에 없는데 경종의 건강이 좋지 못하고 후사가 없음을 들어 왕세제의 책봉을 주장한 것이다.
한편 소론인 우의정 조태구를 비롯하여 사간 유봉휘 등은 경종의 후사를 기다려보자는 시기상조론을 주장하며 왕세제 책봉을 적극 반대하였다. 연잉군 또한 소를 올려 왕세제로 책봉됨을 극구 사양하였다. 그러나 결국 노론측 대세에 밀려 경종 1년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4년 경종이 승하하자 즉위한 영조는 바로 붕당의 폐해를 지적하며 탕평의 정책을 시행하였다. 왕세제로 책봉된 뒤 노론과 소론의 정치적 갈등으로 신변의 위협을 느낀 영조는 신임옥사를 통해 실세로 등장한 소론의 영수 김일경, 남인의 목호룡 등을 숙청하였다. 또한 영조 1년에는 을사처분을 통해 노론을 다시 중용하였다.
그러나 영조가 의도하였던 탕평정국과는 달리 노론 내 강경세력인 준론자들은 소론에 대한 공격을 일삼는 등 또다시 노론․소론의 파쟁으로 흘러가자 1727년에는 노론 내 준론세력들을 축출하였다. 곧 이어 1729년에는 을유처분으로 노론, 소론의 탕평세력을 고르게 등용, 초기의 탕평정국을 이루었다. 이와 같은 탕평책은 요직의 인선에 반영되어 쌍거호대(雙擧互對)의 방식을 취하였다. 노론 홍치중을 영의정으로, 소론 이태좌를 좌의정으로 삼아 상대하게 하고, 이조의 인적 구성에 있어서도 판서에 노론 김재로를 맡기면 전랑에 노론 신만으로 상대하게 한 것이 그러한 사례이다. 이러한 쌍거호대의 방식은 정국이 안정되자 능력에 따라 중용하는 유재시용(惟才是用)의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이와 같은 정책의 변화는 극심한 붕당정치의 갈등을 해소할 수 있다는 자신감의 표출로 왕권강화의 토대가 되었다. 그 결과 초기 재능에 관계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소론만 등용하다 탕평정국이 본궤도에 오르자 이의 정착을 제도적으로 보장하려는 방향으로 그 기반을 강화시켜나갔다. 이러한 정국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을 고르게 등용, 탕평정국을 확대시켜나갔던 것이다.
영조는 생애 가운데 1762년(영조 38) 사도세자가 뒤주에 갇혀 죽임을 당하는 참극을 경험하였다. 탕평책에 따라 다시 정계에 발을 들인 남인과 소론은 정치적 실세인 노론에 맞서 사도세자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잡을 기회만 노리고 있었다. 이에 대해 노론은 김한구, 홍계희 등이 나경언을 사주하여 사도세자의 비행과 난행을 고발하게 함으로써 뒤주 속에 가두에 죽이는 참사를 일으키게 된 것이다.
영조는 정치적 갈등이 극심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갈등을 가라앉힘으로써 조선 후기 부흥기를 마련한 영명한 군주로 평가되고 있다. 그는 1776년 3월 5일 83세로 경희궁 집경당에서 승하였다. 조신시대 국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가장 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뒤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장서각에는 원릉비 탁본이 여러 본 소장되어 있다. 즉 1776년(정조 즉위)에 세운 원릉비의 탁본으로 전면과 음기가 각각 7점씩 남아있다. 그러나 제첨에 ‘원릉비음기(元陵碑陰記)’ 또는 ‘원릉비(元陵碑)’라 하여 장황 시가가 서로 다른 두 계열의 탁본이 있다. 한편 장서각에는 『영종대왕국휼등록(英宗大王國恤謄錄)』이 소장되어 있어 영조의 장례과정을 소상하게 살필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영조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8세기 중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영종대왕국휼등록(英宗大王國恤謄錄)』(장서각 2-298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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