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url:./treeAjax?siteMode=prod}
홈으로 > 자료분류 > 수집분류/왕실/고서

사도장헌세자영우원비(思悼莊獻世子永祐園碑)

자료명 사도장헌세자영우원비(思悼莊獻世子永祐園碑) 저자 이선(李愃), 이산(李祘), 이산(李祘), 이산(李祘),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6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닫기

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양주(楊州) 남중량포(南中梁浦) 배봉산(拝峯山) (현재주소: 경기도 화성시 안녕동 산1-1)
· 작성시기 1776
· 비고 2-5286, 2-5286-1, 2-5286-2
1776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선(李愃) 1735 - 1762 조선 왕족
찬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전서자 이산(李祘) 1752 - 1800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합본200.0/전210.4/음기239.3 X 합본78.1/전79.0/음기73.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3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닫기

내용

정의
사도세자(思悼世子)의 영우원(永祐園)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사도장헌세자영우원비(思悼莊獻世子永祐園碑)
[내용 및 특징]
1776년(정조 즉위) 정조가 아버지인 사도세자의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높이고, 묘의 봉호도 영우원(永祐園)으로 고치면서 세운 표석의 탁본이다. 장서각에는 전면 2점과 음기 3점으로 모두 5점이 소장되어 있으며, 모두 족자의 형태로 장황하였다. 1776년 양주(楊州) 남중(南中) 양포(梁浦) 배봉산(拜峯山)(서울 동대문구 휘경동)에 세운 비문이다.
사도세자의 본관은 전주(全州), 성은 이(李), 이름은 선(愃)이다. 자(字)는 윤관(允寬)이며, 호는 의재(毅齋)이다. 시호는 사도(思悼)ㆍ장헌(莊獻)으로 시호인 사도세자나 장헌세자로 더 알려져 있다. 조선 제21대 영조(英祖)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영빈이씨(映嬪 李氏)이다. 홍봉한(洪鳳漢)의 딸인 혜경궁 홍씨(惠慶宮 洪氏)를 비로 맞이해 의소세손(懿昭世孫) 이정(李琔), 제22대 왕인 정조(正祖) 이산(李祘), 청연군주(淸衍君主), 청선군주(淸璿君主)를 낳았으며, 궁인 출신의 양제임씨(良娣林氏)와 수칙박씨(守則 朴氏)와의 사이에서 은언군(恩彦君) 이인(李䄄), 은신군(恩信君) 이진(李禛), 은전군(恩全君) 이찬(李禶), 청근현주(淸瑾縣主)를 낳았다.
영조는 왕위에 오른 뒤에 맏아들인 경의군(敬義君) 이행(李緈)을 세자로 삼았으나 그는 1728년 10세의 어린 나이로 죽었다. 그 뒤 오랫동안 아들을 낳지 못하다가 1735년 음력 1월 21일에 후궁인 영빈이씨와의 사이에서 사도세자를 낳았다. 이처럼 오랜 기다림 끝에 태어난 아들이었으므로 그는 서자로 태어났지만, 영조의 정비인 정성왕후(貞聖王后)의 양자가 되어 원자(元子)의 칭호와 세자로서의 예우를 받았다.
사도세자는 대리청정의 과정에서 영조와 노론, 소론 등 당파 간의 정치적 갈등에 휩싸이면서 몸이 쇠약해졌고 갖가지 질병에 시달렸다. 『영조실록』과 『한중록(閑中錄)』 등에는 그가 평소 두려워하고 겁을 내는 증세가 있었으며, 심리적 압박 때문에 새 옷을 갈아입지 못하거나 가슴 통증에 시달리는 등 심리적 질환도 앓고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영조실록』에 따르면, 1761년에 은신군 이진과 수칙박씨를 때려서 죽인 것, 여승(女僧) 출신의 가선(假仙)이라는 여인을 궁으로 불러들인 것, 궁중의 궂은일을 담당하는 액속(掖屬)의 무리들과 어울려 방탕한 생활을 하며 시전 상인들의 물품을 거두어들였을 뿐 아니라 액속들이 위세를 빌어 상인들에게 행패를 부린 일 등이 고발된 것으로 보인다. 영조는 음력 5월 24일에 직접 흥화문(興化門)으로 나아가 시전 상인들을 불러 장조가 거두어들인 빚을 갚아주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음력 윤5월 13일(7월 4일)에는 장조를 죽이기로 결심하고 그를 휘령전(徽寧殿)으로 불러 자결을 명령했다. 사도세자는 자결하려 했으나 세자궁의 여러 신하들이 이를 말렸다. 그러자 영조는 사도세자를 세자의 자리에서 내쫓고 서인(庶人)으로 삼는다는 명을 내렸고, 사도세자의 생모인 영빈이씨가 고변한 내용을 전하며 그를 뒤주에 가두었다. 다음날에는 사도세자를 시위하던 환관 박필수(朴弼秀)와 여승 가선, 서읍(西邑)의 기녀 다섯 명을 참수했다. 뒤주에 갇힌 장조는 8일째인 음력 윤5월 21일(7월 12일)에 사망했다. 그의 나이 28세였는데, 영조는 시호를 ‘사도(思悼 )’로 묘의 봉호를 ‘수은묘(垂恩墓)’로 내렸다. 정조가 왕위를 물려받던 해에 시호를 ‘장헌(莊獻)’으로 추상하였으며, 묘의 이름도 ‘영우원(永祐園)’으로 격상하였다. 이후 1789년(정조 13) 7월에서 10월에 걸쳐 영우원을 화성의 화산(花山)으로 옮기고 ‘현륭원(顯隆園)’을 조성하였다. 뒷날 고종은 1899년 장헌세자를 장조(莊祖)로 추존하고, 현륭원의 명칭은 융릉(隆陵)으로 고쳤다.
[자료적 가치]
사도세자의 간략한 이력과 함께, 18세기 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확인할 수 있는 자료이다. 또한 사도세자 사후 각종 추숭으로 인한 호칭의 변화와 능제의 변화까지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영조실록(英祖實錄)』 『고종실록(高宗實錄)』
『[莊祖]永祐園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624~13626)
『[莊祖]顯隆園園所都監儀軌』(규장각 13627~13630)
『[莊祖]顯隆園遷園儀軌』(규장각 13629)
『顯隆園謄錄』(장서각 2-2383)
『顯隆園誌文』(장서각 2-4010)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 인명
  • 관직명
  • 나라명
  • 건물명
  • 관청명
  • 지명
  • 연도
  • 문헌명
  • 기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