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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소전구기비(文昭殿舊基碑)

자료명 문소전구기비(文昭殿舊基碑) 저자 미상, 미상, 이금(李昑),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48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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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복궁 문소전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종로구 경복궁)
· 작성시기 1772
· 비고 25348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미상
미상
이금(李昑)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신도비(神道碑)
· 크기(cm) 172.3 X 66.2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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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신의왕후(神懿王后)의 문소전 옛터에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문소전구기비(文昭殿舊基碑)
[내용 및 특징]
영조가 태조비 신의왕후(神懿王后, 1337~1391)를 추모하기 위해 신의왕후의 신위를 봉안했던 경복궁 문소전 옛터에 세운 비문을 탁본한 자료이다. 『영조실록』 48년 5월 19일로부터 30일까지의 기사를 보면, 이 비를 세우게 된 경우가 자세히 실려 있다.
영조가 5월 19일에 경복궁 교태전 옛터에 나아가 부복한 다음 이어서 문소전의 옛터에 나아가 추모의 뜻을 펼쳤으며, 5월 23일에 다시 문소전의 옛터에 나아가 사배(四拜)한 다음 호조에 명하여 비를 세우게 하였는데, ‘문소전 옛터에 임진년 5월에 세운다.’는 내용을 어필로 직접 써서 내렸다. 그리고 5월 30일에 비각이 완성되자 문소전의 옛터에 나아가 이를 봉심하고 비를 세우는 역사에 참여했던 이들에게는 상급을 하사한 내용이다. 실록의 기록을 통해 입비의 역사가 5월 23일 시작해 30일에 끝나, 매우 빠른 진행을 보였음을 알 수 있다.
탁본에는 ‘문소전구기(文昭殿舊基)’라고 쓴 전면과 연기(年紀)가 쓰여 있는 음기를 따로 분리하여 2개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탁본면의 가장자리는 문양이 없는 비단을 댔다. 천리에 풍대가 있으며, 족자의 축은 목축이다. 천리의 우측 사양에 약간의 좀이 슬었지만, 탁면의 보존상태는 양호하다. 서체는 행서로 영조의 어제어필이다.
문소전구기의 위치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문소전을 세우게 된 배경과 문소전의 체제, 그리고 각 시기에 따른 문소전의 이안(移安)과정에 대해 살펴볼 필요가 있다. 문소전의 원래 명칭은 대소전(大昭殿)이었다. 1398년(태조 7) 신의왕후의 신주와 진영을 봉안하였는데, 따로 전각을 만든 것이 아니라 경복궁의 별전에 봉안하고 묘호를 인소전이라 하였다. 이후 1406년(태종 6)에 따로 신전을 지어 신의왕후의 신위를 이안하였고, 이때에 비로소 독립된 전각인 인소전이 서게 되었다. 그러다가 1408년(태종 8) 태조가 승하하자 묘호를 인소전에서 문소전으로 고치고, 태조의 신주를 문소전에 봉안하였다. 그리고 1410년(태종 10)에는 태조와 신의왕후의 신주를 종묘 제 5실에 합부하고, 진영은 문소전에 봉안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정립된 문소전은 종묘와 그 성격이 달랐다. 종묘는 국가적 차원의 정묘인데 반해 문소전은 국왕을 정점으로 한 왕실차원의 원묘(原廟)였던 것이다. 이후 태종이 승하하자 광효전(廣孝殿)을 세웠는데, 세종은 선왕이 죽을 때마다 원묘를 세우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하여 결국 경복궁 북쪽에 새로 5칸의 원묘를 지어 신주들을 합사하기로 하였다. 1432년(세종 14)에 문소전과 광효전의 신위를 새로 지은 원묘에 함께 봉안하고 이름을 문소전이라 하였는데, 이후 문소전이라는 묘호와 5실의 체제는 그대로 유지되었다. 경복궁이 임진왜란과 1553년(명종 8)의 화재로 소실된 이후 1554년(명종 9) 중건되었지만, 문소전은 재건되지 않아 이후 자취가 끊기게 되었다.
1530년(중종 25)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문소전이 경복궁 안의 동쪽에 조성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문소전에는 각각 감실이 딸린 후침(後寢)과 전전(前殿)을 두어 삭망에는 후침에 제사하고 사시의 대향 때에는 신주를 전전에 모셔 내어 합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동국여지비고』에는 문소전을 경복궁 안 동쪽 건춘문 안에 세웠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다만 1433년(세종 15)에 세워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는 시기보다 1년이 늦다. 이 기록에 의하면 임진년 병화에 위판을 매안하고 폐지하였으며, 1772년에 집을 짓고 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있어 영조실록의 내용과 일치한다. 건춘문은 경복궁 동문에 해당하며, 현재 광화문의 동쪽인 동십자각에서 북쪽 삼청동으로 올라가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비석의 글씨는 영조의 어필로 훙서하기 4년 전에 썼다. 파임을 길고 부드럽게 처리한 획법에서 부왕 숙종의 영향을 받은 듯한 행서의 운필이 나타난다. 임종 2년 앞에 쓴 장서각 소장 《선조계사년주필처비(宣祖癸巳年駐蹕處碑)》에 비해 소탈한 운필을 보이면서도 흩트리진 자형이 없어 영조 말년 어필의 또 다른 풍격을 엿볼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문소전의 원래 위치와 이안과정을 살펴볼 수 있는 사료적 가치고 있다. 서예사에 있어 영조 말년 어필의 다양한 풍격을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漢景識略』 / 유본예 /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6. 『신증동국여지승람』 / / 민족문화추진회, 1969. 『궁궐지Ⅰ』 / / 서울시립대학교부설 서울학연구소, 1994. 『경복궁』 / 이강근 / 대원사, 1998.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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