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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현왕후탄강구기비(仁顯王后誕降舊基碑)

자료명 인현왕후탄강구기비(仁顯王后誕降舊基碑) 저자 민씨(閔氏), 이금(李昑), 이금(李昑), 미상
자료명(이칭) 계사년주필처비(癸巳年駐蹕處碑) 저자(이칭) 이연(李昖)|미상|이금(李昑)|미상
청구기호 K2-5261-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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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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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한성부(漢城府)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 (현재주소: 미상)
· 작성시기 1761
· 비고 2-5261-1, 2-5261-2
176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민씨(閔氏) 1667 - 1701 조선 왕후
찬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서자 이금(李昑) 1694 - 1776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사적비(事蹟碑)
· 크기(cm) 전246.8/음기247.0 X 전92.6/음기92.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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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肅宗)의 계비(繼妃)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가 태어난 옛터에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현왕후탄강구기비(仁顯王后誕降舊基碑)
[내용 및 특징]
영조(英祖, 1694~1776)가 부왕(父王) 숙종(肅宗)의 계비(繼妃)인 인현왕후(仁顯王后, 1667~1701)의 탄생을 기리기 위해 인현왕후가 태어난 옛터에 세운 비문의 탁본이다.
탁본은 ‘인현성후탄강구기(仁顯聖后誕降舊基)’라고 쓴 전면과 비를 세우게 된 대략적인 사유를 서술한 음기를 따로 탁본하여 2개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전면 탁본의 사양(四鑲)에는 문양이 없는 갈색 비단을 대었으며, 풍대(風帶)가 없는 대신 천리(天裏)와 지라(地裏) 사이에 약 3㎜의 흰색 비단을 대었다. 전면과 음기 모두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축은 목축(木軸)으로 마무리하였다. 전면과 음기 모두 해서로 씌였으며, 영조의 어제어필이다.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 閔氏, 1667년 5월 15일(음력 4월 23일)~1701년 9월 16일(음력 8월 14일))는 숙종의 계비이다. 본관은 여흥(驪興), 여양부원군(驪陽府院君) 민유중(閔維重, 1630~1687)과 은성부부인(恩城府夫人) 송씨(宋氏)의 딸이다. 1680년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 김씨가 천연두로 사망하여 불과 반달 만인 1681년(숙종 7) 숙종의 계비가 되었다. 1688년 후궁 장씨(張氏)가 아들 윤(昀, 후일의 경종)을 낳자 숙종은 이 왕자를 원자를 정하고자 했으나, 당시 조정을 장악하고 있던 서인들은 원자정호를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다. 원자 정호 문제는 결국 기사환국으로 이어져 1689년 서인들이 쫓겨나고 남인들이 집권하였으며 그녀 역시 폐서인되어 안국동 사가로 내쳐졌다가, 1694년(숙종 20) 갑술환국의 여파로 복위했다. 1700년(숙종 26)에 발병한 괴질로 투병하다 1701년(숙종 27)에 사망했다. 1713년(숙종 39)년 존호 효경(孝敬), 1722년(경종 2) 휘호 의열정목(懿烈貞穆), 1753년(영조 29) 존호 숙정(淑聖), 1776년(영조 52) 존호 장순(莊純), 1890년(고종 27) 존호 원화(元化)가 각각 추상되었다.
인현왕후는 1681년(숙종 7) 숙종의 계비로 간택되어 가례를 올리고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왕자를 낳지 못한 반면 소의(昭儀) 장씨(張氏)는 후일 경종(景宗)으로 즉위하는 왕자 윤(昀)을 낳게 되자 당시 정치적 상황과 맞물려 폐서인 되는 운명을 맞았다. 1689년(숙종 15) 왕자 윤의 원자 책봉과 관련하여 송시열 등 노론은 상소하여 이에 반대함으로써 숙종과 심하게 대립하였다. 숙종은 기사환국을 통해 노론을 축축하고 남인을 등용하였으며, 인현왕후 역시 희빈(禧嬪)으로 지위가 오른 장씨에 밀려 폐서인 되어 안국동 본댁인 감고당(感古堂)에서 지내게 되었다. 1694년 소론의 김춘택(金春澤) 등이 인현왕후의 복위운동을 계기로 갑술옥사가 일어나, 이를 저지하려던 남인들은 유배가거나 사사되고 인현왕후는 복위되었다. 그러나 오래지 않아 1701년(숙종 27) 35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였다. 시법에 따라 의논하여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하는 것을 인(仁)이라 하고, 행실이 중외에 나타남을 현(顯)이라 한다’는 의미로 인현(仁顯)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또한 능호는 명릉(明陵), 전호(殿號)는 경녕(敬寧)이라 하였다.
이 비문의 음기에는 인현왕후가 태어난 옛터의 위치가 적혀 있으며, 영조가 옛터를 방문하여 석비와 비각을 세우게 된 경위가 간략하게 기술되어 있다. 비문에는 인현왕후가 태어난 옛터를 서부(西部) 반송방(盤松坊)으로 적었는데, 이곳은 지금의 서대문구 중심지역을 가리킨다. 『영조실록』 37년 7월 30일 기사에는 인현왕후가 태어난 곳의 위치가 보다 자세히 실려 있다. 즉, 영조가 도승지에게 인현왕후가 탄강한 유지(遺址)를 알아보라고 하자 도승지 조영진이 ‘반송방 입암(立巖)의 아래’라고 잘못 아뢰었는데, 입암은 인왕산 상봉 못미쳐 사직공원 쪽에 있는 굽은 성(曲城) 중턱에 있는 곳으로, 선바위라고도 불리는 곳이었다. 영조가 이곳에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고, 손수 비액(碑額)을 써서 ‘인현성후탄강구기’라 하고 ‘영모비(永慕碑)’라고 칭하였는데, 이튿날 당시의 국구(國舅) 민유중(閔維重)의 집에서 보관하던 장적(帳籍)을 통해 인현왕후가 차동(車洞)에서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결국 영조가 다시 명을 내려 차동에 비석과 비각을 세워 유지를 표시하게 하였는데, 차동은 서소문 서북쪽에 있던 마을로 ‘수렛골’로 불리었으며, 인현왕후탄강구기비를 세운 이후에는 그녀를 추모하는 뜻에서 ‘추모동’으로 부릴기도 하였다. 지금의 중구 순화동(巡和洞) 5번지에 해당하는 지역인데, 이 비석은 1936년 여양민씨 종중에 의해 다른 곳으로 옮겨졌다.
이 비석의 서체는 어필로 주목되는데, 영조의 해서는 촉체(蜀體)로 불리는 조맹부(趙孟頫)의 글씨를 근간으로 하고 있으며, 영조가 쓴 해서도 대부분 촉체 계통이다. 이 비에서도 부왕 숙종의 어필을 계승한 유연한 획법의 촉체를 구사하였는데, 전면에 비해 음기의 글씨에서 이러한 특징이 더욱 드러난다.
[자료적 가치]
석비가 세워졌던 원래의 위치에 이 비석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있지만, 구기비를 세운 내력과 입비위치를 상고하는데 도움이 되며, 영조 노년의 어필을 이해하는데 유용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서울 명소고적』 김영상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58.
『서울특별시 동명연혁고』Ⅲ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 1977.
『한국지명총람』1(서울편) 한글학회, 1966.
『영조대왕 글․글씨』 궁중유물전시관, 2001.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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