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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종대왕장릉비(元宗大王章陵碑)

자료명 원종대왕장릉비(元宗大王章陵碑) 저자 이부(李琈), 구씨(具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3-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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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김포시 (현재주소: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 산141-1)
· 작성시기 1753
· 비고 2-5243-1, 2-5243-2
175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부(李琈) 1580 - 1619 조선 왕족
피전자 구씨(具氏) 1578 - 1626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26.7/음기226.0 X 전91.2/음기91.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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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원종(元宗)과 인헌왕후(仁獻王后)의 장릉비(章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원종대왕장릉비(元宗大王章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6대 국왕 인조(仁祖)의 부왕(父王)인 추존왕 원종(元宗, 1580~1619)과 그 비(妃) 인헌왕후(仁獻王后, 1578~1626)의 장릉(章陵)에 세운 표석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장릉비 탁본은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족자로 남아있다. 두 점 모두 탁면에 오금(烏金)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심청색(深靑色) 비단을 대었으며, 천리에 미색 비단으로 만든 풍대(風帶)가 두 줄로 부착되어 있다. 축두(軸頭)는 나무로 만들었다. 전면은 천리에서 탁면 상단 사이에 다수의 좀구멍이 있고, 음기는 천리 우측에 비단으로 메운 자국이 두 군데 있다.
탁본의 전면에는 소전체(小篆體)로 ‘조선국 원종대왕장릉 인헌왕후부좌(朝鮮國 元宗大王章陵 仁獻王后祔左)’라고 새겨져 있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원종과 인헌왕후의 약력이 있다. 인종에 대해서는 탄생, 승하, 장례의 시기와 장지, 향년, 정원군(定遠君) 책봉과 대원군(大院君) 추존(追尊), 왕위(王位) 추숭(追崇),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諡號)를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인헌왕후에 대해서는 탄생, 승하, 장례시기와 장지, 향년, 군부인(郡夫人) 책봉, 부부인(府夫人) 책봉, 왕후(王后) 추숭을 순서대로 기재하였다. 이들은 사후에 왕과 왕비로 추숭되었기 때문에 다른 왕릉 표석과 달리 책봉과 추존 사실을 뒤에 붙인 것이 특징이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원종대왕장릉비(元宗大王章陵碑) 음기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원종은 인조의 아버지이자 선조의 다섯째 아들로, 휘는 부(琈)이며, 저경궁(儲慶宮) 인빈김씨(仁嬪金氏)의 소생이다. 1587년(선조 20) 정원군(定遠君)에 봉해졌고, 1604년 임진왜란 중 왕을 호종(扈從)하였던 공으로 호성공신(扈聖功臣) 2등에 봉해졌다. 이복형 광해군(光海君)이 왕위에 오르고 나서 동모형 임해군(臨海君)을 유배 보내 사사하고, 1615년(광해 7)에는 능창군(綾昌君)을 유배 보내 사사하는 등 신변의 위협을 크게 받았다. 1619년(광해 11) 40세의 나이로 승하하자, 처음에는 그 유택(幽宅)을 원제(園制)로 하여 양주(楊州) 군장리(群場里)에 흥경원(興慶園)을 조성하였다가 1627년(인조 5) 김포(金浦)로 천장하였다. 이후 1632년(인조 10) 이귀(李貴) 등의 주청에 따라 원종으로 추존하고 능호(陵號)를 장릉(章陵)이라 하였다.
피전자 인헌왕후는 능성구씨(綾城具氏)로, 능안부원군(綾安府院君) 구사맹(具思孟)의 딸이다. 1590년(선조 23) 가례를 올려 연주군부인(連珠郡夫人)에 봉해졌다. 1626년(인조 4)에 경희궁 회상전에서 승하하여 육경궁(毓慶宮)에 안장되었는데, 1632년(인조 10) 왕비 추숭과 함께 진호(進號)를 장릉(章陵)이라 하면서 능역도 개수하였다. 능제(綾制)로 추봉할 때 난간석을 두르지 않은 것은 일계(一階)의 석물을 그대로 둔 다른 추존왕릉의 예를 따른 것이다.
장릉(章陵)은 현재 경기도 김포시 풍무동에 동원쌍릉(同原雙陵)의 형태로 조성되어 있다. 장릉은 현재 사적 제 2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릉비는 1753년(영조 29) 건립되었으며, 비신(碑身)의 높이는 151㎝, 폭 69.5㎝, 두께 37.5㎝이다. 장릉의 능제(陵制) 및 제반 사실 또는 규례에 대한 자료로 장서각에 소장된 『장릉지(章陵誌)』를 참조할 수 있다. 이 능지는 1876년(고종 13) 장릉령(章陵令) 박응한(朴應漢)이 재편(再編)한 능지이다. 이 자료에는 장릉 관련 기사(紀事), 김포군연혁(金浦郡沿革), 계양산내맥(桂陽山來脈), 상설(象設), 정자각(丁字閣), 제향(祭享), 의주(儀注), 관원(官員), 수호군(守護軍), 절수탄장(折授炭場), 추숭사적(追崇事蹟), 비문규격(碑文規格), 수목(樹木) 등의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한편 범례의 내용을 통해 속지(續誌) 편찬의 범위가 구지(舊誌)를 보충하되 국조(國朝)에서 간행된 문헌에 기재된 사실만을 골라서 첨기(添記)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추숭사적’에서 원종으로 추숭될 때의 여러 예론이 약기되어 있어 원종의 추숭 관련 여러 논의들을 참고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원종과 인헌왕후의 왕과 왕비 추숭과 관련한 능제의 변화과정을 살필 수 있고, 조선 중기 국왕과 왕비의 능비를 후기에 다시 세운 사례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18세기 중반 금석문의 제작과 장황방식까지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인조실록(仁祖實錄)』
『장릉지(章陵誌)』(장서각 소장, 2-4479)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왕릉석물지(朝鮮王陵石物誌)』 은광준 편저 민속원, 1985.
『(문화유산)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엮음 한국문원, 1999.
『조선의 왕릉』 이호일 가람기획, 2003.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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