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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경숙빈소령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

자료명 화경숙빈소령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 저자 최씨(崔氏), 이금(李衿), 이금(李衿),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65-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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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 267)
· 작성시기 1753
· 비고 2-5265-1, 2-5265-2
175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최씨(崔氏) 1670 - 1718 조선 왕족
찬자 이금(李衿) 1694 - 1776 조선 왕족
서자 이금(李衿) 1694 - 1776 조선 왕족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46.8/음기247.0 X 전92.6/음기92.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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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숙종의 후궁이자 영조의 사친 숙빈 최씨(淑嬪崔氏, 1670~1718)의 소녕원(昭寧園) 앞에 세운 비석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화경숙빈소령원비(和敬淑嬪昭寧園碑)
[내용 및 특징]
이 비석은 1753년(영조 29) 숙빈최씨에게 시호를 올리고 소녕묘를 소녕원(昭寧園)으로 승격하며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영장리에 세운 것이다. 전면과 음기로 나누어 무늬 없는 비단으로 장황하였다. 풍대(風帶)와 옥축(玉軸)을 달아 마무리하였다. 제첨은 ‘소녕원상시봉원비(昭寧園上諡封園碑)’로 되어 있다. 전면과 음기를 모두 영조가 직접 짓고 썼다. 장서각에는 전면과 음기가 각각 두 점씩 소장되어 있는데, 보존상태는 모두 양호한 편이다. 전면에는 ‘조선국/화경숙빈소녕원(朝鮮國/和敬淑嬪昭寧園)’을 대자해서로 썼다. 음기에는 1753년 상시(上諡)와 봉원(封園)한 내용을 간략히 기록하였다.
숙빈 최씨는 영의정에 추증된 최효원(崔孝元)의 딸로, 일곱 살에 궁에 들어가 1693년(숙종 19) 숙원(淑媛)에 봉해졌고, 숙종의 후궁이 되었다. 이듬해 왕자 연잉군을 생산하고 이 해 숙의(淑儀)에 올랐으며, 이듬해 귀인(貴人)으로 승자(陞資)되었다. 연잉군은 경종(景宗)의 뒤를 이어 21대 조선의 왕으로 즉위한 영조이다. 1699년(숙종 25) 내명부 정1품인 숙빈에 올랐다. 1718년(숙종 44) 3년간 앓아온 병이 위중해져 궁을 나와 창의동 사제에서 요양하다가 결국 3월 9일 사망하였는데, 이때 나이 49세였다. 소생으로는 왕자 세 명이 있었지만 첫째와 막내는 일찍 죽고 둘째 왕자가 후에 영조가 되었다. 숙빈 최씨가 사망하자 숙종은 관판(棺板)을 수송하게 하고, 제수를 넉넉히 보내도록 명하는 등 직접 장례를 주관하였다. 그해 5월 12일 양주(楊州 )에서 예정하고 9월에 묘비를 세웠다.
영조는 즉위하자마자 자신의 생모인 숙빈 최씨의 사당인 육상묘(毓祥廟)를 경복궁 북쪽에 조성하였다. 또 1753년(영조 29)에는 화경(和敬)이라 추시(追諡)하였고, 묘는 육상궁(毓祥宮), 묘는 소녕원으로 각각 승격하였다. 이해는 숙빈 최씨가 숙종의 후궁으로 숙원(淑媛)에 봉해진 지 60년 되는 해였다. 비문에서는 이때를 맞아 영조가 눈물을 삼키며 친히 글을 짓고 썼다고 밝혔다.
한편 영조는 즉위 초 자신의 친어머니 숙빈 최씨의 사당을 순화방에 세웠다. 또한 묘의 관리는 대원군(大院君) 봉사손(奉祀孫)의 예를 준행하여 4대 이후에도 돈녕정(敦寧正)이 세습하도록 하고, 전감(典監)을 두어 수호하도록 규례를 정하였다. 1761년(영조 37)에는 숙빈 최씨가 태어난 서학동(西學洞) 여경방(餘慶坊) 옛집의 형지(形址)를 그려오게 하는 한편, 숙빈 최씨의 아버지 최효원과 외조부 홍계남(洪繼南)의 자손들로 하여금 대대로 살면서 전매(轉賣)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글을 짓고 글씨를 쓴 영조는 숙종과 숙빈 최씨 사이에서 태어나 1699년(숙종 25) 인잉군(延礽君)에 봉해지고 1721년(경종 1)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1724년 숙종이 승하하자 조선 21대 임금으로 즉위하였다. 영조는 정치적 갈등이 극심한 시기에 왕위에 올라 왕권을 강화하고, 정치적 갈등을 가라앉힘으로써 조선 후기 부흥기를 마련한 영민한 군주로 평가된다. 특히 후궁 출신의 어머니를 둔 군주로서 정치적 기반이 약한 점을 사친에 대한 극진한 효(孝)를 표방하면서 극본해낸 국왕으로 평가되기도 한다. 이러한 사실은 사친에 대한 여러 추숭사업에서도 잘 드러나며, 이 자료의 경우 조선시대 왕실금석문으로는 드물게 국왕이 직접 짓고 쓴 사례인 점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숙빈 최씨와 관련한 금석문 자료는 이 자료 외에도 《숙빈최씨묘비(淑嬪崔氏墓碑)》, 《숙빈최씨묘갈(淑嬪崔氏墓碣)》, 《숙빈최씨신도비명(淑嬪崔氏神道碑銘)》 등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환국(換局)’으로 대변되는 숙종 대 정치상황과, 후궁에서 빈까지 이른 왕실여성의 삶을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아들 영조에 의한 추숭사업의 일환으로 제작된 숙빈 최씨 관련 금석문을 일괄해볼 수 있는 자료이다. 왕실 금석문으로는 드물게 국왕이 직접 글을 짓고, 글씨를 쓴 드문 사례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京畿金石大觀』 경기도, 1982~199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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