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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대왕효릉비(仁宗大王孝陵碑)

자료명 인종대왕효릉비(仁宗大王孝陵碑) 저자 이호(李岵), 박씨(朴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8-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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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고양시 (현재주소: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 산37-1)
· 작성시기 1753
· 비고 2-5238-1, 2-5238-2
175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호(李岵) 1515 - 1545 조선 왕족
피전자 박씨(朴氏) 1514 - 1577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20.8/음기220.1 X 전81.8/음기82.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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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종(仁宗)과 인성왕후(仁聖王后)의 효릉비(孝陵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종대왕효릉비(仁宗大王孝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2대 국왕 인종(仁宗, 1515~1545)과 정비(正妃) 인성왕후(仁聖王后, 1514~1577)의 능인 효릉(孝陵)에 세운 표석(表石)을 탁본하고 족자(簇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인종대왕효릉비》 탁본은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족자 형태로 남아 있다. 두 점 모두 탁면(拓面)에 오금(烏金)을 먹였고, 사양(四鑲)은 미색 비단으로 둘렀다. 천리(天裏)와 지리(地裏)는 심청색(深靑色) 비단을 대었고, 천리에 미색으로 만든 풍대(風帶)가 부착되어 있다. 축두(軸頭)는 목축(木軸)이며, 전반적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전면에는 소전체(小篆體)로 ‘조선국 인종대왕효릉 인성왕후부좌(朝鮮國 仁宗大王孝陵 仁聖王后祔左)’라 새겼다. 음기에는 해서체로 인종과 인성왕후의 간략한 약력을 새겼다. 인종에 대해서는 탄생, 왕세자 책봉, 수선(受禪), 승하, 장례시기와 장지, 재위기간과 향년, 그리고 명나라에서 내린 시호(諡號)를 기재하였다. 인성왕후에 대해서는 탄생, 세자빈 책봉, 왕비 진봉, 승하, 장례시기와 장지, 향년을 기재하였다. 음기의 말미에는 표석의 건립연대를 밝혔다. 음기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실려 있다.
피전자 인종은 중종(中宗)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장경왕후(章敬王后) 윤씨(尹氏)이다. 여섯 살 때인 1520년(중종 15) 세자로 책봉되었는데 학문을 좋아했다고 전한다. 또한 성품이 선하여 효성과 우애가 깊었으며, 누이 효혜공주(孝惠公主)가 죽자 매우 애석해하여 병을 얻기까지 했다. 1544년(중종 39) 중종이 승하하자 청경궁에서 즉위하였으나 이듬해 재위 8개월 만에 향년 31세로 후사 없이 승하하였다. 승하한 해 명(明 ) 세종(世宗)이 ‘영정(榮靖)’이라는 시호를 내렸고, 같은 해 묘호(廟號)를 ‘인종(仁宗)’, 시호(諡號)를 ‘헌문의무장숙흠효(獻文懿武章肅欽孝)’로 정하여 올렸다. 묘호에서 ‘인(仁)’은 ‘인을 베풀고 의를 행함’을 뜻한다. 또한 시호에서 ‘헌(獻)’은 ‘총명예지(聰明叡智)’를, ‘문(文)’은 ‘도덕박문(道德博文)’을, ‘의(懿)’는 ‘체화거중(體和居中)’을, ‘무(武 )’는 ‘강강직리(剛强直理)’를, ‘장(章 )’은 ‘경신고명(敬愼高明)’을, ‘숙(肅)’은 ‘집심결단(執心決斷)’을, ‘흠(欽)’은 ‘위의실비(威儀悉備)’를, ‘효(孝)’는 ‘병덕불회(秉德不回)’를 각각 뜻한다.
피전자 인성왕후는 나주박씨(羅州朴氏)로 금성부원군(金城府院君) 박용(朴墉)의 딸이다. 1524년(중종 19) 세자빈에 책봉되었고, 인종의 즉위와 함께 왕비에 올랐다. 세자빈으로 책봉될 때의 책문에는 ‘명문(名門)에서 아름다움을 길러 공경을 갖추고 숙덕(淑德)하여 순한 덕을 지녔으며 깊고 조용한 경지에 이르고 예(禮)에 어그러지지 않으며 온순하여 웃어른의 명을 잘 따랐다.’고 기록하였다. 인성왕후는 1577년(선조 10) 향년 64세를 일기로 경복궁에서 승하하였다. 1547년(명종 2) ‘공의(恭懿)’의 존호를 받았고, 승하한 해에 ‘인성(仁聖)’의 시호와 ‘효순(孝順)’의 휘호(徽號)를 받았다.
인종과 인성왕후의 효릉은 현재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동원쌍릉(同原雙陵)으로 조성되어 있다. 인종의 봉분은 병풍석을 두른 모습인데 반해 난간석으로 연결된 인성왕후의 봉분은 병풍석이 없다. 기록에 따르면 인성왕후가 승하하자 인종 곁에 장사지내면서 왕명으로 효릉을 개수하면서 병풍석을 두른 것이다. 효릉은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의 희릉(禧陵), 철종과 철인왕후의 예릉(睿陵)과 같은 묘역을 이루어 서삼릉(西三陵)이라 불린다. 서삼릉은 현재 사적 제 200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릉비의 건립연대는 1753년(영조 29)이며, 비신의 높이는 139㎝, 폭은 62.5㎝, 두께는 28.5㎝이다.
효릉의 능제(陵制) 및 제반 사실과 규례에 관한 자료로 장서각에 『효릉등록(孝陵謄錄)』과 『효릉지(孝陵誌)』가 있고, 규장각에도 『효릉지』 두 건이 소장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조선 중기 국왕과 왕비의 능비를 후기에 다시 세운 사례를 확인할 수 있고, 18세기 중반 금석문의 제작과 장황방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세종실록(世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효릉등록(孝陵謄錄)』(장서각 소장, 2-2394)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왕릉석물지(朝鮮王陵石物誌)』 은광준 편저 민속원, 1985.
『(문화유산)왕릉』 한국문원편집실 엮음 한국문원, 1999.
『조선의 왕릉』 이호일 가람기획, 2003.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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