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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장세자묘[합부]비(孝章世子墓[合祔]碑)

자료명 효장세자묘[합부]비(孝章世子墓[合祔]碑) 저자 이행(李緈), 조씨(趙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8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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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조리읍 봉일천리 산4-1)
· 작성시기 1752
· 비고 2-5281
1752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행(李緈) 1719 - 1728 조선 왕족
피전자 조씨(趙氏) 1715 - 1751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189.0 X 90.7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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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효장세자(孝章世子)와 효순현빈(孝純賢嬪)의 합봉비(合封碑)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효장세자묘[합부]비(孝章世子墓[合祔]碑)
[내용 및 특징]
1752년(영조 28) 효장세자(孝章世子)의 빈(嬪)인 효순현빈(孝純賢嬪) 조씨(趙氏, 1715~1751)는 37세의 나이로 타계하여 효장세자의 묘에 합봉되었다. 이 금석문은 현빈조씨의 장례 때에 효장세자의 표석 공면에 현빈조씨의 내용을 추가로 새겨 넣고 이를 탁본하여 장황한 것이다. 원래의 표석은 1729년(영조 25)에 효장세자의 묘를 조성할 때 세운 것으로 장서각에 《효장세자묘비》의 이름으로 탁본이 전한다.
합봉비의 전면에는 ‘조선국 효장세자묘(朝鮮國 孝章世子墓)’가 2행으로, ‘효순현빈부좌(孝純賢嬪祔左)’가 1행으로 모두 소전체(小篆體)로 새겨져 있다. 음기는 해서로 새겼다. 탁면이 고르고 자획의 윤곽이 선명하다. 현재 장서각에는 전면과 음기가 하나의 족자로 장황된 3종의 효장세자묘비 탁본이 소장되어 있다. 족자의 장황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남색비단을 대었지만, 문양이 바래 확인되지 않는다.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비단을 대어 장황하였다. 천리(天裏)는 좌우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역시 미색비단으로 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목축(木軸) 좌우의 마구리(莫只)는 옥을 깎아 부착하였다.
효장세자의 자는 성경(聖敬), 이름은 행(緈), 시호는 효장(孝章)이다. 영조의 맏아들로 비(妃)는 좌의정 조문명(趙文命)의 딸 효순왕후(孝純王后)이다. 1724년 영조가 즉위하자 경의군(敬義君)에 봉해지고, 1725년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그러나 10세에 사망하여 이복동생 사도세자(思悼世子)가 왕세자가 되었다. 사도세자마저 즉위하지 못하고 죽자,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가 그의 양자(養子)가 되어 즉위함에 따라 진종(眞宗)으로 추존되었다. 효장세자가 사망하자 영조는 사가(私家)의 분묘보다 후한 양식으로 장례할 것을 명하였고, 장례의 절차는 묘소도감과 예장도감에서 주관하였다. 1729년(영조 5) 1월 26일에 장례를 마치고 묘호(墓號)를 효장묘(孝章墓)라 하였다. 현재 경기도 파주군 조리읍 봉일천리 산4-1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205호로 지정되어 있다.
효순현빈 조씨는 본관이 풍양(豊壤)이며, 조부는 도사를 지낸 증영의정(贈領議政) 풍흥부원군(豊興府院君) 조인수(趙仁壽)이며, 아버지는 분무공신(奮武功臣) 2등에 녹훈된 바 있고 좌의정을 지낸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이다. 현빈조씨는 1715년(숙종 41) 12월 14일 동부 숭교방(崇敎坊)에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양녕대군의 후손인 증참판(贈參判) 이상백(李相佰)의 딸이다. 1727년(영조 3)에 13세의 나이로 효장세자의 빈으로 간택되었으나 가례 다음해에 효장세자의 죽음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1751년(영조 27)까지 37세의 생의 살다가 효장세자의 기일 하루 전인 11월 14일 창덕궁 의춘헌에서 사망하였다. 1752년(영조 28) 정월 11일 효순(孝純)의 시호를 받았고, 같은 달 22일 효장세자의 묘 왼쪽 을좌(乙坐)에 부장되었다.
음기의 내용은 효장세자의 탄생, 세자 책봉, 그리고 졸년의 간지와 연월을 기록하고 장지는 성종비(成宗妃) 공혜왕후(恭惠王后)의 능인 파주 순릉(順陵) 왼쪽 언덕의 을좌향(乙坐向)이며, 외안산(外案山)은 묘좌(卯坐)로 기록되어 있다. 애초 효장세자의 묘표를 제작하였을 때 전면의 전서와 음기를 새긴 비석 측면에는 후일 빈(嬪)의 관을 묻고 합봉할 때 내용을 써서 넣을 공간으로 남겨두었다. 이 합봉비를 살펴보면 뒤에 현빈조씨를 합봉할 때에는 새로운 표석을 세우지 않았고 효장세자묘 표석의 공면에 현빈을 부좌한다는 표제와 음기를 써넣었음이 확인된다. 추가로 새긴 글씨는 효장세자 묘표의 글씨 및 음기의 서체와 비교를 통해 다른 사람이 썼음이 확인된다. 음기의 내용에서는 세자빈의 탄생과 세자빈으로의 책봉, 그리고 현빈으로의 사호(賜號), 합봉한 해의 간지와 연월 및 나이를 2행으로 기록하였다.
한편 규장각 소장 『효순현빈예장도감의궤(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에 의하면 표석은 족자로 만든 후 의례에 따라 나누어 소장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표석은 지석의 탁본과 함께 족자로 만들었는데, 지석을 분아(分兒)한 예로 미루어 보면, 5전(殿)에 먼저 진상하였고, 등록에 의거하여 도제조, 양당상, 도청, 본방낭청, 감조관, 차지중사 등에게 각 한 건씩 나누어졌다. 즉 한 번에 여러 점의 탁본을 만들어 왕실의 장례 준비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나누어준 것이다. 이는 장례 행사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갖게 하고 자신의 참여한 역사(役事)에 대한 기록물이자 기념물의 기능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이 금석문은 《효장세자묘비(孝章世子墓碑)》와 함께 하나의 표석에 장례의 시기가 다른 세자와 세자빈의 표문을 차례로 새겨 넣은 사례를 보여주며, 18세기 중반 탁본과 그 장황방식 등을 연구하는데 중요한 자료이다.

참고문헌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孝純賢嬪禮葬都監儀軌』(규장각 14874)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64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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