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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의왕후혜릉비(端懿王后惠陵碑)

자료명 단의왕후혜릉비(端懿王后惠陵碑) 저자 심씨(沈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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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 작성시기 1747
· 비고 2-5272-1, 2-5272-2
174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심씨(沈氏) 1686 - 1718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39.0/음기237.0 X 전84.8/음기85.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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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경종비(景宗妃) 단의왕후(端懿王后)의 능표석(陵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단의왕후혜릉비(端懿王后惠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20대 국왕 경종(景宗)의 비(妃) 단의왕후 심씨(1686~1718)의 혜릉(惠陵)에 세워진 능표석을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전면과 음기를 각각 별개의 족자로 제작하였다. 전면은 자획의 윤곽이 선명하고 먹색 또한 고르며 단정하게 칠해진 상태이다. 전면은 ‘조선국/단의왕후혜릉(朝鮮國/端懿王后惠陵)’의 9자를 전서로 새겼고, 음기는 5행에 걸쳐 단의왕후의 탄생, 세자빈 책봉, 승하한 해의 간지와 연월을 기록하였고, 장지와 왕비로 추봉된 해의 간지를 적었다. 음기의 마지막 행에는 ‘숭정기원후일백이십오년(崇禎紀元後一百二十五年)’이라 하여 1747년(영조 23)에 비를 세웠음을 밝혔다. 현재 장서각에는 혜릉비 족자의 전면과 음기가 각 1점씩 소장되어 있다.
족자로 장정된 전면과 음기의 탁본 2점은 같은 크기로 제작되었다. 장황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천리의 상하길이가 지리보다 약간 긴 비례로 제작되었다. 문양은 없으며, 부분적으로 원래의 색이 바랜 상태이다. 탁면 상하와 조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 비단인 백릉(白綾)을 대었는데, 역시 문양은 넣지 않았다. 천리에는 좌우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미색 비단의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는데, 목축(木軸) 좌우의 막지(莫只)까지 하나의 나무로 만들었다.
단의빈 심씨는 경종의 세자빈이다. 본관은 청송(靑松)으로, 첨정(僉正)으로 우의정에 증직된 청은부원군(靑恩府院君) 심호(沈浩)의 딸이다. 1686년(숙종 12) 5월 21일 회현동에서 태어나 11세인 1696년(숙종 22) 세자빈으로 간택되어 5월 19일 왕자 윤(昀)과 가례를 올렸다. 1718년(숙종 44) 2월 7일 창덕궁 장춘헌에서 갑자기 병으로 사망하였다. ‘단의(端懿)’라는 시호는 숙종이 빈청에서 대신들과 의논하여 지은 것으로, 덕성이 너그럽고 온화하여 거룩하고 착하다는 뜻을 담았다. 타고난 품성이 뛰어나 어릴 때부터 총명하고 덕을 갖추어 어리지만 양전(兩殿)과 병약한 세자를 섬기는데 손색이 없었다. 능은 혜릉(惠陵)으로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2-1 동구릉 내에 있다.
단의왕후의 장례는 1718년(숙종 44) 4월 18일에 행해졌다. 단의왕후는 1720년 경종이 즉위하자 왕후에 추봉되었고, 1726년(영조 2) ‘공효정목(恭孝定穆)’의 휘호가 추상되었다. 능호는 ‘혜릉(惠陵)’이다. 혜릉은 현재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위치해 있으며 유좌묘향(酉坐卯向)의 단릉(單陵)이다. 능제(陵制)는 인현왕후의 능인 명릉(明陵)의 제도를 따라 문무석(文武石)을 비롯한 각종 석물이 사람 몸 크기인 등신대(等身大) 정도로 왜소화되어 있으나, 문인석의 얼굴이 당대의 유행과는 다른 이색적인 안형(顔形)을 취한 것이 특징이다.
상설(象設) 배치물은 곡장(曲墻) 3면, 난간석(欄干石) 12칸, 혼유석(魂遊石) 1, 명등석(明燈石) 1쌍, 문인석(文人石) 1쌍, 무인석(武人石) 1쌍, 마석(馬石) 2쌍, 양석(羊石) 2쌍, 호석(虎石) 2쌍, 정자각(丁字閣), 수라청(水刺廳), 망료석(望燎石), 표석(表石), 홍살문(紅살門), 재실(齋室) 등이 있다.
단의왕후의 능비는 1718년(숙종 44) 묘를 단장할 때 세우지 않았고, 이로부터 30년이 지난 1747년(영조 23)에 세워졌다. 이는 음기의 마지막에 ‘숭정기원후일백이십오년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五年立)’이라는 기록에서 확인된다. 단의왕후의 상례 절차를 기록한 『단의왕후국휼등록(端懿王后國恤謄錄)』(규장각 18175)에도 표석에 대한 기록이 없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혜릉석물추배도감의궤(惠陵石物追排都監儀軌)』에 의하면 1722년(경종 2)에 혜릉에 석물을 추가로 설치하였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때에느 표석은 세우지 않았다. 혜릉의 표석은 『영조실록(英祖實錄)』 22년 11월 19일의 기사에서 확인된다. 장령(掌令) 김한운(金翰運)이 상소하여 혜릉에 표석을 세울 것을 청하였다는 기사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이듬해 8월 19일에는 영조가 목릉에 나아가 전알례(展謁禮)를 행하고, 건원릉(健元陵), 현릉(顯陵), 휘릉(徽陵) 등을 배알하였다는 기사를 통해 혜릉의 표석은 1747년 8월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짐작된다.
단의왕후와 관련된 자료는 장서각에 《단의빈묘지문(端懿嬪墓誌文)》이 있다. 단의왕후의 묘지문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것이다. 또한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단의빈혼전도감의궤(端懿嬪魂殿都監儀軌)』(규13574, 규14849)가 소장되어 있는데, 단의왕후의 국장 때에 혼전에 관한 기록으로 참고가 된다. 혜릉의 표석과 음기의 내용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권21에 수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단의왕후의 생애를 금석문 자료를 통해 확인할 수 있을 뿐 아니라, 18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경종실록(景宗實錄)』
『端懿王后國恤謄錄)』(규장각 18175)
『端懿嬪魂殿都監儀軌)』(규13574, 규14849)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朝鮮王陵石物誌』 殷光俊 민속원, 1985.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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