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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렬왕후휘릉비(莊烈王后徽陵碑)

자료명 장렬왕후휘릉비(莊烈王后徽陵碑) 저자 조씨(趙氏),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5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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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구리시 (현재주소: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 산4-3)
· 작성시기 1747
· 비고 2-5252-1, 2-5252-2
1747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조씨(趙氏) 1624 - 1688 조선 왕후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37.3/음기241.0 X 전84.7/음기84.9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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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장렬왕후(莊烈王后)의 능인 휘릉(徽陵) 앞에 세워진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장렬왕후휘릉비(莊烈王后徽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6대 국왕 인조(仁祖)의 계비(繼妃) 장렬왕후(莊烈王后, 1624~1688)의 능표석(陵表石)을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장렬왕후의 휘릉은 1688년(숙종 14) 단릉(單陵)으로 조성되었으며, 소재지는 지금의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이다.
장렬왕후의 본관 양주(楊州), 성 조(趙), 창원(昌遠)의 딸이다. 1638년(인조 16)에 왕비로 책봉되었고, 1649년 인조가 죽고 효종(孝宗)이 즉위하자, 대비(大妃)가 되었으며, 1651년 자의(恣懿)의 존호를 받았다. 1659년 효종이 죽자, 효종에 대한 복상(服喪)문제로 서인·남인 간에 대립이 생겼는데, 서인의 승리로 기년복(朞年服)을 입었다. 1674년(현종 15) 며느리인 효종비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다시 복상문제가 일어났다. 서인은 대공설(大功說), 즉 9개월 복상을 주장하였고 남인은 기년설, 즉 1년 복상을 주장하였는데, 이번에는 남인이 승리하여 서인이 조정에서 물러나고 조대비는 1년 복상을 하였다. 이처럼 장렬왕후는 비록 자신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복제 예송의 발단이 됨으로써 조선 중기 정치사에 큰 파장을 일으켰다. 1661년(현종 2) 공신(恭愼)의 존호가 추가되었고, 후에 휘헌(徽獻)·강인(康仁) 등의 존호가 가상되었다.
본래 휘릉에는 능을 조성할 당시 능비인 표석을 세우지 않았다. 표석은 능을 조성하지 58년이 지난 1746년(영조 22) 영조의 명에 의해 세워졌다. 영조는 호조와 예조의 당상을 입시하라고 명한 뒤 하교하기를 “장릉에 석물을 세운 뒤에 휘릉에는 석물을 세우지 않았으니, 같은 오릉(五陵) 안에 있는데도 거행하지 않는다면 다만 흠전(欠典)이 될 뿐이다. 아! 자식 된 자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자기의 마음을 삼아야 하는데, 장렬성후께서는 자전(慈殿)으로서 삼조(三朝)의 받듦을 받은 만큼, 오늘날 나의 도리로서는 궐전(闕典)을 거행함에 있어 마땅히 이 능에 먼저 거행하여야 한다. 봄이 오기를 기다려서 일체 거행토록 하라.”고 하였다(『영조실록』, 22년 11월 21일). 이 기록으로 볼 때 휘릉의 표석은 1747년(영조 23) 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고, 영조는 이해 8월 휘릉을 배알(拜謁)하였다.
탁본의 전면에는 ‘조선국 장렬왕후휘릉(朝鮮國 莊烈王后徽陵)’의 9자를 대자전서(大字篆書)로 새겼다. 글자의 획이 선명하고 먹색도 고르게 입혀져 있으며, 장황 상태도 손실된 부분이 없어 전반적인 보존상태가 양호한 편이다. 음기에는 인조의 계비인 조씨의 탄생, 왕비의 책봉과 승하한 해의 간지와 일자를 기록하였고, 끝 부분에는 장지와 나이를 적었다. 또한 마지막 행에 ‘숭정기원후일백이십년 립(崇禎紀元後一百二十年 立)’이라 적혀 있어, 원비는 장렬왕후를 장사지낸 뒤 약 60년이 지난 1747년(영조 23)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현재 장서각에는 장렬왕후의 휘릉비를 탁본한 전면 1점과 음기 1점이 소장되어 있다.
족자의 장황은 전면과 음기 모두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문양이 없는 남색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비단을 붙여 족자로 만들었다. 천리에는 좌우를 같은 간격으로 나누어 미색비단의 풍대(風帶)를 대었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다.
한편 장서각에는 장렬왕후와 관련한 금석문으로 《장렬왕후휘릉지문》 상․하 2점이 소장되어 있다. 탁면에는 상․하 모두 24행의 내용을 해서로 써서 새겼다. 『[인조장렬후]국장도감도청의궤([仁祖莊烈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4867)에 의하면 지석은 2편으로 만들었으며, 봉상시 관원 1명을 감조관(監造官)으로 하여 전례에 따라 지석의 제작을 담당하였다. 글자를 새긴 지석은 묵본(墨本)으로 인출하고 족자로 장황하여 양전(兩殿)에 진상하는 외에 총호사(摠護使) 이하 담당 방(房)의 관원들에게도 각각 분아(分兒)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탁본하여 장황한 지문은 국장에 참여한 관료들에게 추모의 마음을 되새기게 하는 기록물이자 주요 역사에 참여하였다는 기념물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한편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의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장렬왕후지문비족자(莊烈王后誌文碑簇子)》상․하 각 1점과 《휘릉지문족자(徽陵誌文簇子)》 1점이 소장되었던 기록이 있다. 또한 장렬왕후 휘릉의 지문은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수록되어 있다.
[자료적 가치]
장렬왕후의 휘릉비는 영조연간에 세운 표석을 인출한 금석문으로, 표석을 세우게 된 계기와 사실, 표석의 형식과 서체 등을 비롯하여 17세기 중반 왕실탁본의 수준과 장황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좋은 사례이다.

참고문헌

『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금석총람』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徽陵誌』(장서각 2-4505)
『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505)
『莊烈王后國恤謄錄』(장서각 2-3005)
『[仁祖莊烈后]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4867)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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