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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

자료명 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 저자 향덕(向德), 조영국(趙榮國), 이덕현(李德顯),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347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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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충청남도 공주 (현재주소: 충청남도 공주시)
· 작성시기 1741
· 비고 25347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향덕(向德)
조영국(趙榮國)
이덕현(李德顯)
미상
미상

형태사항

· 유형 정려비(旌閭碑)
· 크기(cm) 174.0 X 97.4
· 판본 낱장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1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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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신라의 효자 향덕(向德)의 효행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한 비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신라효자향덕정려비(新羅孝子向德旌閭碑)
[내용 및 특징]
신라 경덕왕대의 효자 향덕의 효행을 널리 알리고 그를 추모하기 위해 건립된 비석을 종이에 탁본하고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향덕은 신라 경덕왕 때의 효자이다. 『삼국사기』 열전과, 『삼국유사』 향덕(向德) 조에 각각 그의 이야기가 실릴 정도로 효성이 지극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755년(경덕왕 14년)에 흉년이 들고 유행병까지 겹치자 부모는 굶주리고 병들게 되었다. 더하여 어머니는 종기가 나서 거의 죽을 지경이었다. 향덕은 정성을 다하여 어머니를 봉양하면서 자기의 넓적다리 살을 베어 어머니에게 먹이고 어머니의 종기가 난 곳을 빨아내며 살폈다. 당시 이러한 향덕의 효행 사실을 보고하자 경덕왕은 향덕에게 벼 300곡, 집 한 채와 구분전 약간을 내리고 비석을 세워 그의 효행을 널리 알리게 하였다.
향덕은 현재까지 알려진 바로는 국가에서 효행을 포상한 가장 오래된 시기의 인물이며, 정표건립이 일반화되지 않았던 신라시대에서는 기록상 유일하다. 효행의 내용이나 그에 대한 국가적 시책 등에 있어 신라시대는 고려시대나 조선시대에 비해 보다 단순하고 소박하였으며, 유교적 예의관념 등으로 규격화된 양상은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효행에 대한 입비(立碑) 포상은 경덕왕대의 정책과 관련을 가지는 것으로 보인다. 그 후의 효행에 대한 신라왕의 효성에 하나의 기준이 되었다.
원래의 비석은 절단되어 하반부만 남아 있으며 이 비석은 1741년(영조 17년)에 당시 충청도관찰사 조영국이 건립하였다. 비석 전면 중앙에 ‘신라효자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 쓰고 하단부에 향덕의 효성을 칭송하는 명을 새겨 놓았다. 충남 공주시 소학동에 소재하고 있다. 통일신라 때 세운 구비와 조선 영조 때 세운 신비가 각각 1기씩 소학동에 서있다. 구비는 위가 절단되어 하단부만 남았고 전면에 세필로 ‘삼월일중립(三月日重立)’이라 새겨져 있어 건립연대를 알 수 없으나, 형태와 비석의 전후좌우에 남아 있는 초석이 통일신라의 양식인 것으로 미루어 통일신라 때의 것으로 추정된다. 신비는 1741(영조 17)에 건립한 것으로, 8각 대석 위에 규형(圭形) 비신을 얹었다. 현재 충청남도유형문화재 제 99호로 지정되어 있다.
장서각에 소장된 비석은 신비의 탁본이다. 전면과 후면이 함께 장황되어 있다. 탁본은 모두 원탁으로 전면을 오른쪽에 후면을 왼쪽에 두었다. 당초화문이 그려진 황갈색 비단으로 천리, 지리, 사양을 구분 없이 장황하였고 풍대는 없다. 축두는 나무로 만들어 겉을 비단으로 감쌌다. 전면은 중앙에 ‘신라효자향덕지려(新羅孝子向德之閭)’라고 해서로 종서하고, 그 하단에 향덕의 효성을 칭송하는 4언 8구의 명이 음각되어 좌우로 4구씩 각 2줄로 배치되어 있다. 비명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지극하구나, 효자여! 인륜을 지키는 본성을 온전히 지켰구나. 이미 허벅지살을 베고도 또다시 종기를 빨았도다. 임금께서 이를 가상히 여기시어 땅을 주고 집을 내리셨다. 마을이 효자로써 이름났으니 영원토록 그 이름 이어지리라.”
후면에는 구비와 신비의 건립 연대와 명의 찬자가 충청도관찰사 조영국(趙榮國)임, 서자가 공주판관 이덕현(李德顯)임을 알 수 있다. 왼편 아래 구석에는 ‘영건고직오막립(營建庫直吳莫立)’이라고 기재되어 있다. 찬자 조영국은 조선 후기 정치 개혁과 문화 진흥에 많은 공헌을 남겼다. 특히 그의 저술 『농사총론(農事總論)』은 천시(天時)·지리(地利)·농기(農器)·인사(人事)·수리(水利)·부종(付種)·수차(水車)의 중요성을 역설, 종래 다른 농서와 비교된다. 그리고 조태만(趙泰萬)이 찬술한 『양주조씨세보(楊州趙氏世譜)』를 증수하기도 하였다.
[자료적 가치]
향덕의 예를 통해 신라 중대 유교적 예속의 수용과 시행에 대한 초기적 양상의 일면을 엿볼 수 있으며, 경덕왕대의 왕권강화를 위한 유교적 시책이라는 측면도 생각해볼 수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 『삼국유사』 『세종문화유적총람 2』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 세종대왕기념사업회, 1989. 『한국금석문대계』2 / 조동원 / 원광대학교 출판국, 1981 『조선금석총람』하 / 조선총독부 /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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