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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종대왕장릉비(端宗大王莊陵碑)

자료명 단종대왕장릉비(端宗大王莊陵碑) 저자 이홍위(李弘暐), 미상, 미상,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32-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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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강원도 영월군 (현재주소: 강원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1090-1)
· 작성시기 1733
· 비고 2-5232-1, 2-5232-2
1733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홍위(李弘暐) 1441 - 1457 조선 왕족
찬자 미상
서자 미상
전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비(墓碑)
· 크기(cm) 전234.0/음기233.0 X 전82.5/음기82.2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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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단종(端宗)의 장릉(莊陵)에 세운 표석(表石)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단종대왕장릉비(端宗大王莊陵碑)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6대 국왕 단종(端宗, 1441~1457)의 장릉(莊陵) 앞에 세운 표석을 탁본하여 족자(簇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장릉은 경기도 영월군 영월읍 영흥리 산1087번지에 위치하고 있으며, 사적 제 196호로 지정되었다. 단종은 승하한 뒤 240여 년이 지난 1698년(숙종 24)에 장릉(莊陵)의 능호(陵號)를 받았으며, 표석은 1733년(영조 9)에 세워졌다.
장서각에 소장된 장릉비 탁본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며, 자획이 선명하고 먹색도 고른 상태여서 표석을 세운 직후 탁본한 것으로 추정된다. 표석의 전면에는 ‘조선국 단종대왕장릉(朝鮮國 端宗大王莊陵)’의 9자를 소전체(小篆體)로, 음기는 8행의 내용을 해서로 새겼다. 현재 족자로 장황된 장릉비 전면 2점과 음기 2점이 소장되어 있다. 장서각 소장의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의 「봉모당합내외봉장품목록(奉謨堂閤內外奉藏品目錄)」에는 ‘장릉표석전면․음기족자(莊陵表石前面․陰記簇子)’가 각 한 점씩 소장된 기록이 있어 봉모당에도 봉안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장릉표석의 전면과 음기의 내용은 『열정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에도 수록되어 있다.
족자의 장황은 전면과 음기를 각각 한 점의 족자로 만들었는데, 두 형식으로 구분된다. 청구기호 ‘2-5232-1’과 ‘2-5232-2’는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 석류문(石榴紋)이 있는 남색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상하좌우의 사양(四鑲)에도 석류문이 있는 미색비단을 대었다. 남색비단의 석류문은 매우 섬세하며, 가지와 석류가 규칙적으로 반복되는 조형미가 뛰어나다. 천리(天裏)에는 미색비단의 풍대(風帶)를 대었다. 족자의 하단은 향나무축으로 마감하였으며, 목축(木軸) 좌우의 마구리(莫只)에는 옥을 부착하지 않았다. 천리의 길이는 지리의 2배 정도의 비례로 되어 있다. 청구기호 ‘2-5232-1,2’와 ‘2-5232-2,2’는 천리와 지리 및 사양이 별도의 구분 없이 흰색 종이로 장황하였으며, 하단에는 목축을 대었다.
장릉비에는 단종의 탄생으로부터 왕세손, 왕세자의 책봉, 문종의 승하로 등극하게 된 해의 간지와 연월, 그리고 상왕으로 물러나 영월에 거처하던 중 사망한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이어서 숙종 때 시호, 묘호, 능호를 받고, 종묘 영녕전에 배향되었음도 적었다. 음기의 끝 부분에는 ‘上之九年癸丑 命樹石于 陵以識之’라고 기록되어 있어, 1733년(영조 9)에 표석을 세웠음을 알 수 있다.
이 기록과 관련하여 단종이 승하한 후 영조 때 표석이 세워지기까지의 과정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단종이 즉위한 이듬해 왕위를 노린 수양대군(首陽大君)은 단종을 보필하던 재상 황보인(皇甫仁, ?~1453), 김종서(金宗瑞, 1390~1453) 등을 참살하였고, 그 뒤 정권을 장악하면서 단종 측근의 신하들을 차례로 제거하였다. 이후 1455년 단종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넘겨주고 상왕으로서 창덕궁에 머물러 있게 되었다. 이때 성삼문(成三問, 1418~1456) 등 사육신이 왕위복위의 거사를 계획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죽임을 당하자, 이 일을 빌미로 1457년(세조 3) 6월 단종은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 청령포에 유배되었다. 단종은 한양을 떠난 지 7일 만에 청령포에 도착하여 2개월 정도 지내던 중 홍수를 만나 영월의 관풍헌(觀風軒)으로 거처를 옮겼고, 이곳에서 약 1년간 머물렀다. 그 해에 순흥(順興)에서는 금성대군(錦城大君)과 부사(府使) 이보흠(李甫欽) 등이 상왕의 복위를 은밀히 꾀하였으나 발각되어 참살당하는 일이 있었다. 이때 단종은 종묘사직에 죄를 범하였다는 구실로 세조의 측근으로부터 죽임을 강요당하다가 1457년(세조 3) 10월 24일 17세를 일기로 영월에서 승하하였다. 단종이 죽은 뒤 후환이 두려워 아무도 그의 시신을 거두어주는 사람이 없었으나, 영월호장(寧越戶長) 엄흥도(嚴興道)가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현 장릉이 위치한 동을지산(冬乙支山) 기슭에 매장하였다. 이후 1516년(중종 11) 암매장되었던 노산묘는 묘소의 형태를 갖추게 되었고, 선종 때 김성일(金誠一, 1538~1593), 정철(鄭澈, 1536~1593) 등의 장계(狀啓)로 묘역을 수축하고 표석을 세웠다. 1610년(광해 2)에는 노릉암(魯陵庵)이라 하였으며, 1668년(현종 9) 참봉 2인을 두기도 하였다. 이후 단종은 1681년(숙종 7) 노산대군(魯山大君)으로 추봉되었으며, 1698년(숙종 24)에는 노산군에서 복위하면서 시호(諡號)를 ‘공의온문순정안장경순돈효대왕(恭懿溫文純定安莊景順敦孝大王)’이라 하였고, 묘호(廟號)를 ‘단종(端宗)’이라 하였다. 이때 종묘에도 부묘되었고, ‘장릉(莊陵)’의 능호를 받았다. 단종이 승하한지 241년만의 일이다.
1733년(영조 9)에는 장릉에 비석을 세우고 정자각을 건립하였다. 『영조실록』 9년 7월 25일 기사에 의하면, 비를 세우게 된 것은 전경기감사(前京畿監司) 윤양래(尹陽來, 1673~1751)의 청에 의해서였다. 윤양래가 장릉을 돌아보고 비석이 없음을 고하여 능비를 세울 것을 청하였다. 이에 영조는 “영월 수령이 오히려 엄흥도의 비석을 세웠지만, 나라에서 능침에 아직도 비석을 세우지 못한 것이 참으로 부끄럽다.”고 하여 비석을 세울 것을 명하였다. 영조는 장릉에 비를 세우는 것을 본도(本道)에서 거행하되 예조당랑(禮曹堂郞)이 내려가서 도신과 함께 감독하고 비문은 예문관으로 하여금 지어 올리며, 서사관은 이조(吏曹)로 하여금 차출하게 하고 비석 모양은 북도(北道)의 여러 능비보다 약간 크게 하라고 명하였다. 즉 비문을 세우는 것은 강원도관찰사에게 일임하였고, 비문은 예문관에서 지었으며, 글씨는 서사관이 썼음을 알 수 있다.
[자료적 가치]
단종의 억울한 죽음 이후 왕실에서의 그에 대한 추숭사업의 일단을 읽을 수 있고, 18세기 전반 금석문의 제작과 장황방식을 엿볼 수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장릉도감의궤(莊陵都監儀軌)』(규장각 14830)
『장릉봉릉도감의궤(莊陵奉陵都監儀軌)』(장서각 귀2-2368)
『장릉개수도감의궤(莊陵改修都監儀軌)』(규장각 13505)
『장릉사략(莊陵史略)』(규장각 7780)
『장릉지(莊陵誌)』(규장각 3653-1-2)
『봉모당봉장서목(奉謨堂奉藏書目)』(장서각 2-4647)
『열성지장통기(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영인, 2003.
『조선금석총람(朝鮮金石總覽)』하 조선총독부 일한인쇄소인쇄, 1919.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조선왕실의 책』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장서각, 2002.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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