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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대왕장릉[천봉]지문(仁祖大王長陵[遷奉]誌文)

자료명 인조대왕장릉[천봉]지문(仁祖大王長陵[遷奉]誌文) 저자 이종(李倧), 조문명(趙文命), 이요(李橈),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46-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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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경기도 파주시 (현재주소: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25-1)
· 작성시기 1731
· 비고 2-5246-1, 2-5246-2
1731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이종(李倧) 1595 - 1649 조선 왕족
찬자 조문명(趙文命) 1680 - 1732 조선 문신
서자 이요(李橈) 미상 - 미상 조선 종실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208.5/하207.5 X 상136.8/하136.5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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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인조(仁祖)의 장릉(長陵)을 이장(移葬)한 뒤 제작한 지문(誌文)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인조대왕장릉[천봉]지문(仁祖大王長陵[遷奉]誌文)
[내용 및 특징]
조선 제 16대 국왕 인조(仁祖, 1595~1649)의 능인 장릉의 천봉 때에 제작한 지석을 탁출(拓出)하여 족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지문은 사자의 전기를 적은 산문 형식을 글로써 판석에 새겨 능에 매립하였다. 따라서 지문은 땅에 묻기 전에 탁본을 해야 하므로 현존하는 지문 탁본들은 모두 왕릉을 조성할 당시에 탁출한 것이다. 이 지문 또한 1731년(영조 7) 9월에 이장한 장릉에 지석을 매립하기 바로 전에 탁출한 것으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족자의 장황 형식은 상․하단의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에는 석류문이 있는 남색 비단을 대었으며, 탁면 좌우의 사양(四鑲)에는 미색 비단을 대었다. 여기에도 문양이 직조되어 있다. 천리(天裏)에는 좌우의 폭을 3등분한 자리에 미색 비단으로 풍대(風帶)를 부착하였다. 족자의 하단에는 옥을 부착하지 않은 목축(木軸)으로 마감하였다.
지문은 상, 하 2개의 판석에 새인 것으로 탁본 역시 상, 하 2점으로 나누어 제작되었다. 탁면에는 상, 하 모두 43행의 내용을 해서체로 새겼다. 현재 장서각에 소장된 ‘인조대왕장릉천봉지문’은 상 4점, 하 4점인데, 상․하 2점씩 한 짝으로 만들어진 것이다.
인조는 1649년 5월 8일 창덕궁 대조전에서 승하하여 같은 해 9월 20일 파주(坡州) 운천리(雲川里)에 능을 조성하였다. 그런데 능석물(陵石物)의 틈에서 뱀과 전갈이 성하므로 현 위치인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로 이장하였다.
장릉의 이장에 대해서는 장릉이 조성된 지 30년이 훨씬 넘은 1686년(숙종 12)부터 제기되었다. 장릉의 천장에 대한 상소가 올라오자, 숙종은 여러 대신들의 의견을 물었고, 대신들을 장릉에 보내어 살펴보게 하였다. 그러나 천장론과 천장불가의 입장이 서로 부분했다. 1687년(숙종 13) 8월부터 10일까지 숙종에게 올린 상소가 잦았으며, 천장을 둘러싼 대신들간의 논쟁이 특히 심했다. 그러나 숙종은 왕릉의 자로로서 풍수지리적인 조건이 부합하다는 대신들의 의견을 수용하지 않았다.
1729년(영조 7) 또 한 번의 천봉 문제가 제기되었다. 이번에는 능침(陵寢) 사이로 뱀이 출몰한다는 변고가 문제시되었다. 이를 살펴본 대신들도 그 정도가 심함을 아뢰자 영조는 천장을 계획하고 중론을 모을 것을 결심했다. 이때는 풍수의 조건을 따지는 것보다 이장 자체가 더 중요한 사안이 되었고, 숙종 때 논의되던 천장론과는 사정이 달랐다. 능의 손상이 심각한 상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영조는 담당관청으로 하여금 계축년의 예에 따라 천장을 거행할 것을 명하고 홍치중(洪致中, 1667~1732)을 산릉총호사로 삼았다. 1731년(영조 7) 8월 30일 천장이 시행되었고, 영릉(英陵)의 규모를 기준으로 새로운 능을 조성하였다. 그리고 이장한 장릉에도 초장 때와 같이 지석을 매립한 것이다.
『인조장릉천봉도감도청의궤(仁祖長陵遷奉都監都廳儀軌)』(1731년, 규장각 14597)에는 표석에 글자를 새긴 뒤 이를 탁본하고 장황하여 사전(四殿, 즉 대전(大殿), 대왕대비전(大王大妃殿), 중궁전(中宮殿), 세자궁(世子宮))에 진상하고 도감총호사, 당상, 도청, 본방낭청, 감조관, 제술관, 서사관, 차지중사 2명 등에게 각 한 건씩을 나누어주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궁중에 진상한 것 외에도 여러 본의 탁본을 도감의 관원들이 받아 소유하였음을 알 수 있다.
한편 의궤에 의하면 지석의 제작과 이를 탁본하여 족자로 장황하는 업무는 삼방(三房)에서 담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지석 2편은 금천석(金川石)을 사용하였고, 규모는 예기척을 기준으로 길이 5척, 폭 4척 5촌, 두께 6촌 9푼이라 하였다. 처음에는 지석을 정과 망치로 다듬은 뒤 거친 모래인 추사(麤沙)로 갈았고, 다음에는 세사(細沙)를 사용하여 다듬었다. 마지막으로 숫돌로 문질러 마감한 다음 지문의 자수를 계산하여 주홍(朱紅)으로 선을 그은 후 자간을 맞추어 새겼다.
『영조실록』에는 우의정 조문명(趙文命, 1680~1732)이 지문제술관(誌文製述官)으로 지문을 지었고, 서평군(西平君) 이요(李橈, 생몰년 미상)가 지문서사관(誌文書寫官)으로 글씨를 썼다고 기록하였다. 글씨를 쓴 이요는 선조(宣祖)의 왕자인 인성군(仁城君)의 증손이다. 종실이면서도 서민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학문이 깊고 달변이었다고 한다. 영조의 신임이 두터워 수시로 그 자문에 응하여 영조가 추진하는 탕평책에 크게 기여하였다. 한편 사은사 겸 진주사로 청나라에 여러 차례 다녀와 왕으로부터 많은 포상을 받았고, 점차 왕의 신임이 두터워지자 교만해져 부정한 방법으로 재산을 모아 사치를 하자 대사간의 탄핵을 받기도 하였다. 이요는 당시 종실의 금석문을 비롯하여 책보(冊寶) 등을 많이 썼던 인물이다. 그는 18세기 전반 선조계(宣祖系) 종친들 중 글씨를 가장 잘 쓰기로 유명했기 때문에 왕실 편찬업무에 수시로 차출되어 『선원록』과 『국조어첩』 등의 자료를 필사했으며, 궁궐의 현판과 왕족들의 묘비명을 도맡아 썼다. 특히 송설체에 특장이 있어 명성이 있었던 듯, 이규상(李奎象)의 『병세재언록(幷世才彦錄)』에 “종친 가운데 서평군 이요가 있는데, 지위는 일품으로 촉체를 잘 써 필명을 떨쳤다고 한다. 왕실의 문자를 많이 써서 작위가 오르고, 상을 많이 받아 이로 인해 영조의 지우를 입어 마침내 종친의 수반에 올랐다.”고 기록하였다.
[자료적 가치]
지문에 보이는 서체, 석각기술, 인출, 장황, 봉안 등의 특징과 함께, 장릉의 천봉을 둘러싼 당대인들의 인식 등을 볼 때 17세기 대표적인 왕실금석문의 사례로 활용할 수 있다.

참고문헌

『숙종실록(肅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Ⅱ-朝鮮王室 太祖~顯宗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列聖誌狀通紀』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3.
『조선금석총람』하 일한인쇄소인쇄, 1919.
『(仁祖)國葬都監都廳儀軌)』(규장각 13521)
『(仁祖長陵)山陵都監儀軌』(장서각 귀2-2367)
『仁祖大王遷陵謄錄』(규장각 15057)
『仁祖長陵遷奉都監都廳儀軌』(규장각 14597)
『長陵遷奉時分院日記』(규장각 12802)

집필자

성인근
범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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