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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의왕후의릉지문(宣懿王后懿陵誌文)

자료명 선의왕후의릉지문(宣懿王后懿陵誌文) 저자 어씨(魚氏), 이의현(李宜顯), 미상, 미상
자료명(이칭) 저자(이칭)
청구기호 K2-5271-1 MF번호
유형분류 고서/금석문 주제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수집분류 왕실/고서 자료제공처 장서각자료센터(SJ_ROY)
서지 장서각자료센터 해제 장서각자료센터
원문텍스트 장서각자료센터 이미지

· 기본정보 해제 x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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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반사항

· 형식분류 고서-금석문
· 내용분류 교육·문화-예술-금석문
· 소장처유형 공공기관-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작성지역 서울특별시 (현재주소: 서울특별시 성북구 석관동 산1-5)
· 작성시기 1730
· 비고 2-5271-1, 2-5271-2
1730년(건립)
· 소장정보 원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현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작성주체 - 인물

역할 인명 설명 생몰년 신분
피전자 어씨(魚氏) 1705 - 1730 조선 왕후
찬자 이의현(李宜顯) 1669 - 1745 조선 문신
서자 미상
각자 미상

형태사항

· 유형 묘지문(墓誌文)
· 크기(cm) 상181.2/하181.0 X 상91.0/하91.0
· 판본 권자본(卷子本)
· 탁본형태 습탁(濕拓)
· 수량 2면
· 표기문자 한자

· 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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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정의
선의왕후(宣懿王后) 의릉지문(懿陵誌文)의 탁본.
원자료제목
· 표제선의왕후의릉지문(宣懿王后懿陵誌文)
[내용 및 특징]
경종(景宗, 1721~1724)의 계비(繼妃) 선의왕후(宣懿王后, 1705~1730)의 의릉지문(懿陵誌文)을 탁본하고 족자(簇子)로 장황한 금석문이다. 두 개의 지석을 탁본하고 각각의 족자로 장황하였다. 장서각에는 ‘선의왕후의릉지문’이 전면과 음기 각각 세 점씩 소장되어 있다. 이 지문은 1730년(영조 6) 선의왕후가 승하하자 서울시 중랑구 석관동에 있는 경종의 의릉에 합봉하면서 제작된 것이다.
족자는 천리(天裏)와 지리(地裏)의 비단에 연화당초문이 있다. 원래의 끈과 고리, 유소(流蘇), 풍대(風帶) 등이 남아있다. 하단의 축은 옥축(玉軸)이며, 두 점은 목축(木軸)으로 제작하였다. 보존 상태는 대체로 양호하지만, 일부 자료는 축의 옥이 빠지고, 탈색이 진행되거나 배접한 부위가 떨어지는 현상이 있다.
이의현(李宜顯)이 지은 지문에는 선의왕후의 가계를 기술하였고, 침착하고 인자한 성품, 경종에 대한 정렬(貞烈)을 기록하였다. 그 중 의릉에 합봉된 사연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지난날 경종을 양주의 의릉에 장사지낼 때 후(后)가 그 왼편에 묘를 쓸 만한 혈(穴)이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원군에게 이르기를 ‘나는 반드시 이곳을 돌아갈 터로 삼겠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지금 경종과 동강(同崗)에 정하게 되니 대개 성상께서 후의 그때의 뜻을 저버릴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이제야 신도(神道)와 인정(人情)이 모두 유감이 없게 된 것이다.”
한편 영조는 이의현이 지어 올린 선의왕후의 지문을 보고 조태구(趙泰耈), 유봉휘(劉鳳輝) 등을 역신으로 지적한 부분을 직접 삭제할 만큼 이 지문이 후세에 미칠 영향을 고려하기도 하였다.
선의왕후의 본관은 함종(咸從)이며 성은 어씨(魚氏)이다. 영돈령부사(領敦寧府事) 함원부원군(咸原府院君) 어유구(魚有龜)의 딸로 1705년 출생하였다. 1718년(숙종 44)에 첫째 세자빈 심씨(沈氏 : 단의왕후)가 열병으로 죽자 6개월 만인 그해 9월 세자빈(世子嬪)으로 책봉되었고, 경종이 즉위하자 왕비가 되었다. 1724년 (경종4) 경종이 사망하자 선의왕후는 결혼한 지 6년 만에 홀로 되었으며 20세의 나이에 왕대비가 되어 1726년(영조 2) ‘경순왕대비(敬純王大妃)’라는 존호를 받았다. 시호는 ‘선의(宣懿’), 휘호(徽號)는 ‘효인혜목(孝仁惠穆)’이라 하였다. 능은 서울시 성북구 석관동 의릉(懿陵)에 경종과 쌍릉으로 묻혀있다.
지문을 지은 이의현(李宜顯, 1669~1745)의 본관은 용인(龍仁), 자 덕재(德哉), 호는 도곡(陶谷),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1694년(숙종 20) 별시문과(別試文科)에 병과(丙科)로 급제, 검열(檢閱)․정언(正言)․교리(校理)․부응교(副應敎) 등을 거쳐 1708년(숙종 34) 승지(承旨)가 되었다. 1716년 예조참판이 되고 1720년 동지정사(冬至正使)로 청나라에 다녀와 이듬해 형조․예조 판서를 역임하였다. 1722년(경종 2) 신임사화(辛壬士禍)에 연루되어 운산(雲山)에 유배되었다. 1725년(영조 1) 풀려나와 1727년(영조 3) 우의정에 올랐으나 정미환국(丁未換局)으로 쫓겨났다가 다음 해 박필몽(朴弼夢) 등의 반란(叛亂)이 있자 중추부판사(中樞府判事)가 되어 난을 평정하고, 1735년 영의정이 되었다. 청백리로도 알려졌지만 문장에도 뛰어나 『경종실록(景宗實錄)』 편찬에도 참여하였고, 글씨도 잘 써 여러 금석문에 필적을 남겼다.
경종과 선의왕후의 의릉은 1970년 사적 204호로 지정되었다. 경종의 왕릉 아래에 선의왕후의 능이 있다. 왕릉과 왕비의 전후로 비껴 쌍릉제(雙陵制)로 배치되어 있으나 각각 단릉(單陵)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석물의 배치와 전체적인 석물 양식은 숙종의 명릉(明陵)과 같은 양식이다. 석물은 병풍석이 없는 난간석(欄干石)ㆍ혼유석(魂遊石)ㆍ장명등(長明燈)ㆍ망주석(望柱石)ㆍ문무석(文武石)과 말ㆍ양ㆍ호랑이가 있다. 능석물의 배치와 양식은 명릉(明陵: 숙종과 제1계비 인현왕후, 제2계비 인원왕후의 능)과 같이 규모가 작고 간소한 후릉제도(厚陵制度)를 택하였는데 이는 『속오례의(續五禮儀)』를 따른 것으로 보인다.
한편 장서각에는 『의릉산릉도감의궤(懿陵山陵都監儀軌)』와 『경종대왕국휼등록(景宗大王國恤謄錄)』이 소장되어 있어 의릉의 조성과 국휼의 과정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또한 경종과 선의왕후를 합장한 후 의릉에 세운 『경종대왕의릉(합봉)비(景宗大王懿陵(合封)碑)』가 장서각에 소장되어 의릉의 여러 금석문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다.
[자료적 가치]
선의왕후의 이력을 금석문을 통해 확인할 수 있고, 18세기 전반 왕실 금석문의 제작과 탁본, 장황방식까지 이해할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문헌

『경종실록(景宗實錄)』 『영조실록(英祖實錄)』
『산릉도감의궤(山陵都監儀軌)』(장서각 2-2329)
『경종대왕국휼등록(肅宗大王國恤謄錄)』(장서각 2-2916)
『藏書閣所藏拓本資料集Ⅲ-朝鮮王室 肅宗~英祖篇』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5.
『藏書閣所藏拓本資料解題Ⅰ-卷子本』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04.

집필자

성인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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